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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녹색 목요일, 성목요일 : 수난 전날, 부활의 희망, 구원을 향한 마지막 사랑의 표징을 남기다[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 - 박유미]
박유미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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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3  15: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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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물음을 담아 "말해 다오,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녹색 목요일(Gruendonnerstag)이라고도 하는 성목요일, 부활을 향한 회개와 보속의 시기, 사순절 마지막 날이면서 수난이 시작되기 전 제자들에게 봉사하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고 이별 뒤에도 당신이 현존하는 곳, 늘 함께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신 날이다. 7세기 말경부터 성금요일 전날인 성목요일이 휴일로 선포되며 기도하는 날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달력의 날처럼 0시부터 24시까지의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당시의 날짜 계산처럼 해가 지고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다음 별이 보이는 순간까지로 보면, 주님 수난으로부터 부활을 향하는 연속성 안에서 수난주간 성삼일 하루하루의 의미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사랑의 구원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고 표징을 세우신 수난 전날, 성목요일 –체포-판결-십자가의 길-십자가 죽음-무덤에 놓이시기까지 수난의 날, 성금요일– 그리고 무덤의 시간 성토요일, 예수께는 죽음의 안식이자 처형한 이들에겐 시신을 잃지 않도록 무덤 밖에서 깨어 지키는 시간, 제자들에게는 구원자에 대한 희망이 무덤에 묻힌 시간이다. 부활성야, 주님 부활을 알게 되기까지 무덤의 시간.

전통적으로 사순절 마지막 날인 성목요일은 신자들에게는 빚진 사람들이 세금과 이자를 갚고 자유민이 되는 날이자, 사순절 동안 공적으로 참회와 보속을 해야 했던 죄인들(울고 있는 사람들이란 옛 독일어 발음(Grienen)으로 인해 녹색사람들(Gruenen)로 불린 이들이다)이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날이기도 했다. 슈파이어 주교좌 성당 어느 사제의 회계장부에 기록되어 있듯이 신자들은 계란이나 토끼로 세금 빚과 이자를 갚고, 이제는 더 이상 개에 쫓기지 않는 토끼처럼 자유민이 되었다.

   
▲ "예수께서 빵을 적셔서 이스카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요한 13,26)는 장면을 새긴 이탈리아 모데나 대성당 한 벽에 있는 부조. 안셀모 다 캄피오네. (1170년경)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녹색 목요일은 언어적 해석도 있지만, 긴 겨울을 지나 건강과 기쁨을 주는 푸른 봄 채소가 나오는 때, 희망의 초록이 덮이기 시작하는 때, 희망의 상징인 토끼들처럼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 행해졌던 풍습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토착화하면서 수난과 부활을 이어 주는 희망으로 연결해 정해진 이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전통 풍습과 함께 전해 오는 영성의 전통 안에서 성목요일의 의미를 되돌아보며, 수난 전날 구원의 희망을 세우면서 제자들에게 함께하며 보여 주신 사랑의 의미에 맞춰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앞에 사진으로 붙인 1170년경 모데나 성당 부조는 어느 복음사가보다도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요한 사도의 기록을 나타낸다. 사랑으로 고난을 겪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던 중세 중기의 대표적 예술양식 시작이다. "예수께서 빵을 넘겨주시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께서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명하셨다. 죄인조차도 사랑하신 예수, 그분 사랑의 뜻을 담아서 '구원받을 수 없는 악인'으로 나타나는 유다의 모습을 다르게 설명한다.

사실 아직 예수의 수난에 대한 신심보다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에 더 집중되어 있었던 5세기경 어느 지역 예수 수난을 기념하는 십자가 예식에서는 예수와 유다의 십자가를 나란히 세워 놓기도 했었다 한다. '비록 악역이지만'(!), 한없이 약하고 부족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 모든 것을 구원하려는 그분 "구원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구원의 도구가 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모데나 성당의 부조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다의 머리 위에도 성인의 후광이 둘러 있다. '사탄이 들어가기 전' 아직까지는 유다 역시 예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 하나이자 예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리라. 오히려 예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요한 사도의 머리에는 성인의 후광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사랑받았던 어린 사도, 이 순간까지 그는 아직 인간 예수의 따스한 마음에 잠겨 있는 상태라고 보았던 것일지, 이미 그의 마음과 하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일지 가늠해 볼 뿐이다.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당시에는 이렇게 '완전하신 분이 악을 허용하신 이유'로 유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했었다면, 선과 악을 뚜렷하게 규정하고 '죄와 벌'을 강조하던 중세, 오랜 기간을 지난 뒤 현대에 들어와서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면 사랑의 기쁨으로 맞아 주는 하느님의 사랑'이란 눈으로 유다를 다시금 새롭게 대하게 된다. 당시 시대적 배경의 한계를 지니고 있던 인간 유다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들을 구원해 줄 강력한 힘을 발휘할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당시, 예수의 제자로 다니면서 유다가 지녔던 기대와 실망, 그리고 예수를 넘긴 뒤 그에게 닥쳐 올 그 고통을 바로 알지 못했던 무지함 등으로 예수를 넘긴 이유를 보았다. 그리고 예수의 고통을 보면서 즉시 후회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행동에 절망하는 유다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다른 대안도 없었던 막다른 길에 서게 된 유다. 하지만 이런 유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 사랑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한다. 다시금 그 분을, 그분의 사랑을 향하기만 한다면!!!

   
▲ "올리브 동산의 예수", 알프레히트 뒤러(1471-1528)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모두가 약한 인간이기에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현대의 학자들은 유다가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한 잘못들로 상처받고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사랑을 깨달아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어떤 잘못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향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바치신 당신 사랑의 고통을 보아 주길 바라신다. 판단의 잣대를 다른 이들에게 들이대며 심판하기보다 자신의 삶이 주님 사랑을 향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선한 뜻으로 행한 것들도 인정하지 않고 받아 주지 않는 현실에 실망해서 돌아설 것이 아니라, 악이 넘쳐 나도 세상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을 향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유다를 향하고 있는 예수의 그림은 오늘 현대의 새로운 의미를 담아 우리의 신앙을 일깨운다. 사랑으로 고통의 길을 가신 그분에게, 늘 당신을 향하기를 바라는 그분에게 과연 '나는 무엇을 하였는지....?"

성목요일. 많이 알려지고 연주되는 후기 낭만파 작곡가 안톤 브룩크너의 예수 수난곡은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의 마음을 노래하며 또 한번 같은 물음을 던진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https://youtu.be/MDtKVo4tAGM

저 마지막 날 밤에
- 안톤 브루크너(1824–1896)의 예수 수난곡 중에서

저 마지막 날 밤/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던 그 밤에/
나 피땀으로 붉게 물들었다/ 너를 위해 쏟아지듯 피땀을 흘렸다.
하아, 누가 알겠는가, / 혹시 언젠가 너 또한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내 영혼 근심과 번민에 사로잡혔다./ 끔찍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 너의 죄를 위해 치뤄야 할 그 고통에.
하지만, 너를 위해 기꺼이 사랑으로 고통을 겪었다.
아아, 누가 알겠는가,/ 혹시 언젠가 너 또한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아버지!" / 그 시간 이렇게 나는 부르짖었다./ "보십시오, 당신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모든 고통과 탄식이 나의 것이었다./ 너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겪었다.
너, 영혼아/ 말해 다오.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Anton Bruckner(1824 – 1896) : In jener letzen der Nächte

In jener letzten der Nächte,
da ich am Ölberg gebetet,
war ich vom Blutschweiß gerötet,
goss ich ihn in Strömen für dich.
Weh!
und wer weiss,
ob wohl je du auch wohl denkest an mich.

Bangen ergriff meine Seele,
Angst vor den schrecklichen Qualen,
die deine Schuld sollten zahlen.
Doch, ich litt es liebend für dich.
Weh!
und wer weiss,
ob wohl je du auch wohl denkest an mich

„Vater!“
so rief ich zur Stunde,
„Siehe, dein Wille geschehe!“
Mein ward all Leiden und Wehe.
Dies alles tat ich für dich.
Du aber Seele,
sag an, was du für mich schon getan!

 
 
박유미 프리랜서(수산나)
서강대 사회학과, 독일 본, Friedrich-Wilhelm-Uni. 종교사회학 전공, 가톨릭사회론 제1 부전공,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에 대한 시대별 반향으로 본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연구'. 학문과 일상생활, 교회 안의 신앙생활과 일상의 간격에 다리를 잇는 교육과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전례력과 성인들의 가르침에 담긴 사회적 배경 인식과 성찰을 통해서 사회교리의 보편성과 사회영성 일상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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