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9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마태 26,1-27.66

예수의 행적은 신기하거나 새롭거나, 그리하여 독보적인 것이 아니었다. 태초부터 일관되이 지켜 온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 주는 게 전부였다.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을 잊었다, 되찾았다 반복하며 스스로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에 메시아는 기다려졌다가도 때론 죽어 갔고, 죽어 갔다가 다시 부활하기를 반복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변화무쌍한 게 아니라 그 일관된 사랑이 세상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없이 변형되고 조작되며, 그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손 위에서 늘 위태로이 버텨 낸다.

예수는 암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고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임금을 모시듯 환호했다. 그럼에도 암나귀와 군중의 환호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 겸손과 가난의 상징인 암나귀는 승리의 백마를 타고 들어오는 임금과는 맞닿아 있지 않다. 수많은 군중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이용하는 빗나간 신앙의 욕망을 엿본다. 유대 사회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가 올 메시아는 수많은 군중들의 욕망과 적절히 혼합되어 우상으로 존재한 지 오래였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외치는 것은 실은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어야 한다는 군중들의 거친 외면을 감당해야 할 무모한 도전과 같았다.

▲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비틴가우어.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최후의 만찬에서 베드로의 배반과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진다는 서술은 예수가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 역시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고, 번민과 근심에 싸여 십자가의 길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두려움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의탁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순종과 겸손,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이야기하곤 한다. 덧붙여 십자가를 마다 않는 예수의 주도적 행보를 이야기하면서 죽기를 작정한 예수의 그 희생만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감탄해 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예수는 죽기를 무서워 했다. 그가 다만 행한 것은 죽음을 버텨 낸 것이었다. 죽음에 주도적일 이유도, 죽어 가면서까지 사랑을 드러낼 여유도 없었다. 그는 죽으면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되뇌었다. 시편에서 철저히 무너지고 깨어진 이가 울부짖으며 하느님께 올린 기도를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되뇌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예수는 철저히 무너지고 깨어졌다. 예수는 너무나도 힘없는 존재, 인간의 손에 죽어 가는, 그 죽음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나약함 그 자체였다.

아무리 겸손하고, 아무리 낮추어도 사람은 자존을 위한 얼마간의 이기심을 남기기 마련이다. 내가 있어야 네가 있다는 논리, 내가 살아야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는 사람에게 타당하고 정당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달랐다. 내가 완전히 사라져야 네가 산다는 논리를 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그랬다. 내어 놓고 비워 내어 끝까지 자신을 사라지게 한 그 극점에서 하느님은 우리 사람을 만났다. 다만, 우리가 늘 그 극점을 저 앞에 두고 갈까 말까 망설이며 우리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할 뿐이다. 정의든, 평화든, 의로움이든.... 인간이 목놓아 외치는 것들 속에 제 잇속의 계산이 제거된 경우는 없다. 저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겠다는 가소로운 정의감에 쩔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라고 착각한다. 우리는 얼마간의 우상숭배를 곁들인 신앙을 살아가는지 모른다. 짐짓 정의로운 척, 짐짓 죽음을 마다 않고 희생하는 척하기보다, 무섭다, 떨린다, 그래서 힘겹다라는 솔직한 고백이 예수를 참 메시아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린 하느님이 아니라 부족한 인간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