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6]

-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간 처지의 비참함" 읽기 1

내 아들의 생일은 4월 16일이다. 그리고 4월 16일 세월호의 아픔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 4월 16일은 그런 날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날이다. 그런데 누군가 세월호의 아픔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한다. ‘돈’, 사물의 가치 혹은 재산 축적의 대상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그 ‘돈’ 이야기를 한다. 충격이다. 입에 담거나 글로 적을 수 없는 모욕의 말과 글을 토해 낸다. 그 슬픈 아픔을 돈으로 계산 하려 한다. 소중하고 아픈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려 한다. 너무나 가슴 아프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 절대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호의 아픔 앞에서도 계산기를 들었다. 보험금과 보상금을 계산했다. 참 슬프다. 정말 너무 슬프다.

돈이면 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돈이 구세주이고, 돈이 삶의 목적이며, 모든 것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들 살아 왔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돈을 벌기 위해 공부했다. 공부는 돈을 벌기 위한 예비 투자였다.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부당한 권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돈이 이 모든 것의 이유였다. 합리적인 이유가 되어 왔다. 하지만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10세기 이후 서유럽은 돈의 맛을 알아 갔다. 돈이 많다는 것은 호화로운 삶을 뜻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은 호화로운 삶을 원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농노의 신분을 가진다 해도 많은 돈을 가진다면, 무시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낮은 신분에게 돈은 일종의 해방을 의미했다. 돈! 오직 돈만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은 돈에 희망을 두었다. 살아가는 이유이며, 유일한 구원자라 믿었다. 그렇다면, 돈에 의하여 움직이는 그런 세상은 정말 좋은 세상일까?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아래 글을 보자.

“‘탐욕’이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이 그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신이라며 섬기는 것과 같이 탐욕은 눈에 보이는 보물들을 신처럼 섬기기 때문이지요. 이런 우상숭배는 참 성실하게도 커져 갑니다. 돈이 많아지면 우상숭배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참 성실하게도 이 우상을 칭송합니다. 많은 이들이 참 열정적으로 그 보물을 지키려 합니다. 그들은 바로 그 우상 가운데 자신의 희망을 둡니다. 돈 가운데 그 희망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상이 부서질까 두려워합니다. 보물이 줄어들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인간 처지의 비참함" 가운데 발췌, 유대칠 옮김)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익명. (1216년경) (이미지 출처 = de.wikipedia.org)

결국 한마디로 돈이 신이 된 세상은 인간 처지의 비참함이 드러나는 세상이다. 경멸스러운 세상이다. 많은 돈을 소유한다면, 더욱더 많은 권력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돈은 ‘만족’을 주진 않는다. 이것만은 절대 주지 않는다. 이것 이외에 다른 많은 좋은 것을 주지만 ‘만족’만은 주지 않는다. 그러니 오히려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집착으로 어느 순간 돈은 신이 된다. 돈이란 신에게 희망을 걸고 산다. 미래를 걸고 산다. 삶을 바치고 산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이 되기 전 쓴 슬픈 제목의 책 "인간 처지의 비참함"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의 부제는 '세상의 경멸'이다. 인간의 처지는 비참하고 그런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처참하다는 뜻이다. 참 슬픈 제목이다. 그 비참과 처참의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돈’이다. 돈은 참으로 달콤한 인간 삶의 사악한 주인이다.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모든 것을 앗아가는 가혹한 주인이다.

10세기부터 농업생산량이 증대되고 상공업이 발달하게 된다. 서서히 유럽은 부유해진다. 하지만 그 부유함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돈의 맛을 알아갈수록 돈의 무서움도 알아갔다. 빌릴 돈의 이자를 해결하지 못해 파산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치료법이 없어 죽어갔지만, 이젠 치료법이 있어도 치료비가 없어 죽어가야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참 슬픈 시대다. 돈은 또 다른 차원의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열었다. 이렇게 누군가는 많은 돈을 벌어 누리고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는 돈으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며 살았다. 돈이 주는 기쁨이 커질수록 돈에 집착했고, 돈이 주는 고통이 커져도 돈에 더 집착했다. 돈은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모아도 돈은 만족을 주지 않았다. 더 부족하다는 생각만 키워 갔다. 그렇게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되어 갔다. 이 세상은 돈의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는 곳이 되었다. 차디찬 돈의 논리가 구현된 장소가 되어 버렸다. 돈이 신이 되었다. 돈이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돈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인간 처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의 만족을 위해 다른 이의 것이라도 사정없이 빼앗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빼앗음을 능력으로 포장해 주었다. 패자의 불행은 자기 기쁨에 수반되는 어떤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남의 아픔은 보지 않게 만들었다, 오직 돈! 그 돈뿐이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이해하고 돈으로 말하게 하였다. 참 슬픈 세상이다.

이제 보니 세월호의 아픔 앞에서 그들이 보인 태도도 이해하겠다. 아픔보다는 돈이었다.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노가 세월호의 아픔보다 더 중요했다. 참으로 힘들고 힘든 세상이다. 정말 돈이란 인간이란 노예의 가장 달콤한 주인이다. 인노첸시오 3세가 말한 인간 처지의 비참한, 그 주요한 원인으로 돈,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겠다.

4월 16일, 나는 단 한 번도 내 아들의 존재를 돈으로 계산해 본 적이 없다. 할 수도 없다. 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행복과 소중함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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