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36]

"엄마, 나 껌 먹었다!"

다랑이가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순간 누가 또 애들한테 껌을 줬구나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미간을 찡그리는데, 다랑이 표정을 보니 나를 놀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게 보였다.

"헤헤. 사실은 돼지감자 먹었지롱."
"돼지감자?"
"사랑방 마루에 가 봤더니 벌써 다 말랐더라. 맛있는 거나 아니나 한번 먹어 보니까 껌 맛이야."

이렇게 말하며 주먹에 한가득 움켜쥐고 있던 돼지감자 말랭이를 보여 주었다. 며칠 전에 뒷밭에서 캔 돼지감자 한 소쿠리를 씻어서 썰어 말려 두었는데 그걸 먹으며 껌이라고 했던 거다. (과연 그런가 하고 나도 하나 집어 먹어 보았더니 쫄깃쫄깃 씹히는 맛이 정말 껌이랑 비슷하다.) 무쇠솥에 볶아서 차로 끓여 마실까 했던 건데 그냥도 잘 먹는 다랑이. 하긴, 내가 돼지감자를 썰고 있을 때도 맛있다며 잘도 집어 먹던 녀석이다. 아, 나도 다랑이처럼 편견 없이 맛을 음미할 수 있다면!

▲ '와, 이게 다 내 껌이라니!' 돼지감자 말랭이를 들고서 흡족해 하는 다랑이. ⓒ정청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돼지감자랑 별로 안 친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생긴 것이 너무 흉측해서다. 처음 돼지감자를 캘 때 꼭 무덤을 파헤쳐 뼈다귀를 발굴하는 기분이 들었다. (돼지감자는 노르스름한 흰빛이 돌고 둥글거리며 미이라가 붕대를 친친 감고 있는 것처럼 줄무늬가 새겨져 있다. 멋모르는 사람한테 '뼈다귀다!' 하고 던져 주면 아마 십중팔구는 깜짝 놀라고 말 거다.) 보통 감자나 고구마를 못생겼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돼지감자에 견주면 훌륭하기 이를 데 없다. 적어도 나한테는 돼지감자야 말로 못생기고 괴상한 작물의 대표명사다.

두 번째 이유는 돼지감자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싫어서다. 아주 강하지는 않지만 약간 비릿하고 느끼한 냄새가 나는데 그게 영 거북스럽다. 가뜩이나 생긴 것도 비호감인데 냄새까지 풍기니 더 고약하게 느껴진달까? 생으로 베어 물면 무나 야콘처럼 달큼하고 시원한 맛인데 뒤이어 느껴지는 독특한 냄새에 애써 먹어 보려던 마음이 달아나고 만다. 그러면서 내 속으로 그런다. '옛날에 돼지감자가 구황작물로 여겨졌던 까닭이 있구나.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고서야 먹고 싶은 맛이 아니야. 제 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이건 영....'

그럼에도 돼지감자에겐 나름의 매력이 있다. 따로 심을 것도 없이 씨가 한두 알만 땅에 남아 있어도 삽시간에 번지고, 별 다른 거름기가 없어도 땅속에 굵은 알을 주렁주렁 매단다는 것! 비유컨대 불로소득의 짜릿함을 안겨 주는 대견한 작물이며, 게으른 자도 굶어 죽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 선물이 아닐까 한다. 지난해 아주 불친절했던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뒷밭 여기저기에 뭉덩뭉덩 새끼를 낳은 저 놀라운 번식력과 생명력을 보라! 우리가 음식을 통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게 그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임을 떠올린다면 돼지감자를 멀리 내쳐서 될 일이 아니다.(그렇다고 고를 낸다든지 환으로 만들어 굳이 약처럼 복용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편견을 내려놓고 돼지감자와 친해지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의미화 작업, '구렁덩덩신선비'라고 하는 옛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 이야기에 보면 옆집 할머니가 낳은 구렁이를 보고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징그럽다며 달아나지만 셋째 딸은 '구렁덩덩신선비님'이라 반기며 결혼 상대자가 되어 달라는 청에 선뜻 응하지 않는가. 그리고 과연 구렁이는 결혼 첫날밤에 허물을 벗고 잘생긴 선비의 모습으로 변한다. 편견 없이 끌어안으면 그렇듯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을 하고야 마는 거다. 나를 도와주고 나를 빛나게 하는 존재로....

▲ 돼지감자를 넣은 샐러드와 돼지감자&오뎅&검은콩 볶음, 돼지감자로 다싯물을 내어 끓인 미역국까지.... 돼지감자와 친해지려는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엿보이는 밥상. ⓒ정청라

맛의 세계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내게 익숙한 맛과 향이 아니라고 해서 싫어하고 멀리하면 내가 차려 내는 밥상은 닫힌 밥상이 된다. 새로워질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어제 오늘 내일이 거기에서 거기인 무료한 밥상.... 내가 테두리를 정해 놓은 맛의 세계에서만 환희를 찾는 소심한 밥상.... 사실 그 틀을 깨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길들여져 온 혀끝의 감각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지 입맛을 바꾸는 건 무지몽매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만큼이나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갇힌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밥상은, 그리고 삶은 점점 앙상해진다.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어떤 공식에 얽매어 레시피 안에서만 답을 찾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도 있고, 그게 삶의 방식까지도 좌지우지하기 십상이다.('아니, 누가 김밥에 머위나물을 넣어?', '미역국은 소고기로 끓여야 제맛이지!' 같은 식의... 그와 같은 선입견이 강한 사람일수록 정상적인 삶이라고 하는 환상 속에서 본연의 삶을 실종시킨다든가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을 멸시한다든가 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위와 같은 의미화 작업(자기 세뇌 노력)에 힘입어 맛의 세계 또한 개척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오늘 내 앞에 주어진 돼지감자를 요리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고 돼지감자를 깨끗이 씻어서 각종 요리에 활용하였다. 된장국이나 김치찌개에 조금씩 넣어서 먹고, 생채로 무쳐 먹거나 샐러드에 넣어 소스와 버무려 먹고, 오뎅 볶음을 할 때 채 썰어서 함께 볶고, 잡채에도 넣어 먹고, 짜장이나 카레에도 넣어서 끓이고.... 그랬더니 먹을 만하다. 내가 한 음식이 아니라 누가 해다 준 음식이라면 솔직히 돼지감자가 있는지 없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더 맛있게 먹었을 거다. 아직은 내 안의 께름칙함을 다 털어 내지 못한 터라 그 맛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하지만 자꾸자꾸 먹다 보면,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면 언젠가 돼지감자를 바라보면서도 침을 꼴깍 삼키게 되겠지.

이 쓴 걸 왜 먹나 하고 눈을 질끈 감고 먹었던 머위나물이 지금은 달게 느껴지는 걸 보면, 돼지감자와 친해지려는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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