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2일(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예수의 발걸음은 더디다 못해 답답하기까지 하다. 라자로가 죽어 가는데도 예수는 태연하다. 태연한 그만큼 라자로는 죽어 갔고, 죽어 간 만큼 예수는 태연하다. 이야기의 시간 흐름은 결국 시간에 쫓기는 마음을 내려놓게 만든다. 라자로가 죽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급할 게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 말하지만, 영광은 살아 있을 때나 필요한 듯 마르타와 마리아는 라자로가 죽고난 뒤 찾아온 예수 앞에 허망한 아쉬움만 드러낸다. “당신이 계셨더라면....” 하고....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그건 중요치 않다. 제 오빠의 죽음 앞에 예수가 부활인지 생명인지 그건 부차적문제다. 다만 슬플 뿐이고, 슬퍼하는 게 지금은 전부다.

예수의 마음은 북받친다. 두 번이나 북받친다.(11,33.38)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를 두고 라자로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이해한다. 북받치는 감정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은 ‘엠브리마오마이’인데, 과도한 스트레스나 억압으로 인한 긴장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를테면 예수는 지금 속이 불편하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죽음에 휩싸인 채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유대인들 때문에 속이 매우 불편하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우라는 예수의 말을 가로막는 것도 마르타다. 예수를 부활이요 생명이라 믿는다고 한 마르타였기에 예수의 노기는 더욱 크다. 마르타의 고백은 실은 사회가 던져 준 레토릭에 불과했다. 제 삶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제 삶으로 소화시키지 않은, 날것 그대로 익숙해져 버린 소리에 불과했다. 자신 앞에서 예수가 말하고 움직이고 있어도 마르타에게 예수는 없었다.

503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 번호다. 감방에 들어가기 전 박 전 대통령은 많이 울었다 한다. 거짓과 외면으로 일관된 대통령의 시간은 감방 앞에서 비로소 진실과 대면하게 된 것일까. 주위의 정치 모리배가 꾸며 준 허상을 곱씹으며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라 착각했던 박 전 대통령에게서 제 신앙을 살지 않아 제가 믿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일마다 성당을 들락이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수인 번호 503호가 들어갈 방은 라자로의 무덤이자, 우리의 무덤이다. 예수가 ‘나오라’ 할 때까지, 제 모습, 제 신앙을 직시할 수 있는 ‘나흘’이 필요하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감방 앞에서 비로소 진실과 대면한 것일까. (이미지 출처 = 채널A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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