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학 이야기]

삼위일체-관계이신 하느님

요즘 교회가 제시해 주는 전례는 요한복음을 좇아간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성부와 사랑으로 일치되신 분, 성부의 뜻에 온전한 자유로 순명하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성부는 성자와 함께 모든 것을, 당신 신성까지 나누시며, 성자는 성부께 당신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자녀다운 순명을 드리신다. 또한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들의 이 관계성 안으로 초대하신다.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자신 안에 폐쇄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전 존재를 내어주신다. 요한복음을 읽노라면 마치 삼위일체라는 수원지에서 물이 솟아나서 스스로를 가득 채우고 온 세상으로 흘러넘치며, 인류를 감싸 안고 다시 삼위일체께로 되돌아가는 도도한 물결을 보는 것 같다. 가는 곳마다 기쁨과 생명이라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면서 말이다.

‘내어줌’과 ‘자유’

기쁨과 생명을 주는 이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요즘 나는 두 가지 면을 주목하게 된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오직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 존재이시다. 그것도 온전한 자유를 가지고서 말이다. 예수님은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생명을 내어놓으신다. 이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요한 10,10)” 하려는 때문이다. 진리가 가져다 주는 이 자유는 정치적 자유나, 어떤 현자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내적 깨달음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활되는, 거짓과(8,44) 죽음(8,24.51)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이들을 ‘노예’와 대비되는 ‘친구’(15,17), 더 나아가 ‘형제(20,17)’의 관계로 올려주신다.

‘자유’ 없는 ‘내어줌’?

유럽에서 생활한 몇 년동안 나는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전혀 다른 문화에서 살면서 철저히 한국인인 나, 다르게 말하면 내 안에 내재된 한국문화의 특성을 보다 의식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자유와 관련하여 두 가지 체험이 생각난다.

파리 공동체에서 ‘수도서원’에 대한 나눔을 하던 중이었다. 타이완 자매 한 명이 “자신을 봉헌한다”는 말을 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들어보니 자매는 개개인보다는 단체의 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기 문화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른들이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그 집단의 가치에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라 배워왔기에 자기의 자아개념이 아주 약하다는 것을 이제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나를 누군가에게 줄 수가 있을까요? 없는 것을 어떻게 봉헌할 수 있을까요?”라고 이 자매는 정직하게 질문하고 있었다. 분명 유럽인들에게는 낯설었을 이 솔직한 나눔을 계기로 그날 프랑스 사람 셋과 폴란드 사람 한 사람을 포함한 우리 여섯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각자의 문화적 맥락에서 복음을, 서원을 살아가는 것의 풍요로움과 한계를 나누고 배우는, 의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것을 경험하였다. 나에게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가치에 나를 동일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거기서 생활하는 동안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추구하고 생활하는 가치에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경우 아주 만족해하고 또 거기에 기꺼이 헌신하는 반면, 공동체가 내 기대와 갈망에 부합하지 않다고 느낄 경우 내 안에서 갈등을 경험하며, 종종 그 갈등을 창조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화를 잃어버린 나를 성찰하면서 나는 공동체에 동화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내 마음 깊이에, 앞에서 예를 든 타이완 자매와 같은 뿌리를 보았다. 진리와 함께라면 철저히 혼자일 수도 있는 자유로움이 내게는 부족했던 것이다.

자유로이 내어줌

이 성찰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내 삶이 지금까지 ‘내어줌’, ‘봉사’의 차원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 내가 어떤 자세로 내어주고 있는지, 내 삶을 봉헌하겠노라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초대라 느껴진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방편으로서의 내어줌, 허영심과 이기심이 섞여 있는 봉헌, 자기의 진짜 목표를 겉으로 가린 채 실천하는 내어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개별 위격이 맺고 있는 온전히 이타적이고도 외부로 개방된 관계를 표현하는 ‘내어줌’은 각자가 가장 깊은 내면에서 하느님(그러니까 진리와)하고만 존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전제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자유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문화와 사회, 교육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 사회, 문화를 형성하지만 또한 우리 각자는 그 안에서 형성되며 그 가치를 내면화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문화와 사회, 교육 전반이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라게 하는 지, 그 자유를 바탕으로 참으로 이타적으로 살도록 지향하는 지를 묻고 정직한 답을 찾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겠다. 그 어느 내적, 외적 장애에도 왜곡되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게 행사하는 사랑만이 생명을 자라게 하고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감춰진 의도가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 권위를 가지게 될 때 오는 폐해는 굳이 애써 둘러보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기쁨과 영광과 사랑

그 반대의 예를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폴란드 형제를 대신해 아사 감옥에 가기를 자청한 순간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의 행위가 온전한 ‘자유’로 선택한 ‘내어줌’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야말로 세상에 참된 의미의 기쁨과 생명을 가져다 준다. 어제 서울에 도착한 오체투지 순례단이 감동을 주고, 그 메시지가 진정성을 지니는 것 역시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게 어렵고 힘든 고난을 부과하는 그분들의 선택에서 참된 의미의 자유에서 비롯한 내어줌의 아름다움이 투명하게 배어나오지 않은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기쁨과 생명이 피어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고...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라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시고,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그 궁극적 목적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홍현정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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