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4월 2일(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죽음은 사막의 여정에도 있었고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도 많은 방식으로 현존하고 있다. 주님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예수님의 친구들

이 베타니아 가족들은 예수님의 추종자들로서 제자들이며 친구들(더 장황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인 친구들)이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건강 상태에 관해 소식을 듣지만 분명하게 와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아니다. 심부름하는 사람은 단순히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라는 말을 전한다. 그 말처럼 예수는 베타니아의 가족을 사랑했다.(11,5) 주님은 그의 생명을 구하러 유대로 돌아간다. 제자들은 두려워하나 스승은 자신의 사명이 밝은 대낮에 수행되어야 하며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둠은 그분을 쓰러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11,7-9) 그 빛 속에서 두려움 없이 제자들은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두려움은 죽일 뿐이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친구라고 부른다.(11,11) 라자로를 만나러 가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유대에서는 죽음이 예수님과 그분의 추종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토마스는 이것을 느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 이 토마스는 후에 예수님이 참으로 부활했는지 알고 싶어 했던(20,25.27) 바로 그 토마스다. 무덤은 죽음의 징표이지만 항상 열려 있고 생명을 가져오는 행동의 하느님께는(에제 37,12) 닫혀 있지 않다. 죽음이 정복되면서 그들은 “내가 주님이다”라고 말하는 존재를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이 말한다. 마르타의 불평은 우정이 끈질기다는 것을 보여 주며, 마르타 자신도 예수님으로부터 비슷한 응답을 듣는다: “나는 부활이다.”(요한 11,17-25) 예수님은 생명을 구체화한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성령의 현존

▲ 예수가 라자로를 살리다.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예수님은 그분의 사명을 의식하고 있으나,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또한 친구로서 사랑하는 친구들의 고통을 나누며 그들과 함께 운다.(11,33-36)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들은 라자로의 죽음을 이미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말한다: “벌써 냄새가 납니다.”(11,39) 예수님은 그 말에 요지부동이다. 그분은 아버지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면서 감사를 드리고 크게 외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11,43) 그분은 누워 있던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묶었던 것을 풀어 주며 죽었던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다.(에제 37,14) 우리 역시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죽음으로 점철된 현실에 생명을 가져오도록 초대받고 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폭력에 의해 점점 더 황폐화되어 가는 가난하고 소외되며 억압받는 이들의 근본적인 인권, 즉 생명에 대한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과제에 연관된 위험과 오늘날 자주 발생되는 협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지켜야 한다. “성령은 의로움으로 인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로마 8,10)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따라서 죽음은 이미 극복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현존이 우리를 마비시키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게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이 도전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을 없애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활기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평범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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