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서 보낸 4년] 소록도에서, 노인병동

▲ 소록도 바닷가에서

나의 하루는 새벽 일찍부터 시작된다. 다른 몇몇 친구들도 나와 함께 봉사를 하러 가기 때문에 같이 일어난다. 전날 떠들다 늦게 자서 몸이 제대로 말을 안 듣는다. 푸른 누리보다 여기가 더 힘든 것 같다. 세상 살면서 쉬운 일 하나 없다는 걸 잠에서 깰 때부터 느끼니 짜증이 팍 나고 더 자고 싶어진다. 게다가 섬이라서 새벽에 나가면 딴 곳보다 훨씬 싸늘해서 숙소 밖에서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만 맞아도 마음이 오락가락 한다. 이불과 피로의 유혹을 이겨내고 봉사자 회관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다니는 길로 백록과 사슴들이 지나간다. 순간 흠칫 했지만 금방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사슴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아 이 자식들 거리에 똥 누고 지나갔다.

노인병동에서

정신 병동에서 쫓겨나다시피 노인병동으로 온 이후로 나는 노인 병동으로 새벽 봉사를 하러 간다. 쫓겨났다는 표현보다는 정신 병동의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표현이 더 순화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내 탓도 있으니 반쯤은 쫓겨 난 거다. 식사수발을 하러 가는데 우리에겐 새벽이지만 여기 계신 분들에겐 아침 식사다. 일은 정신병동에서랑 똑같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깨우고 수저를 갖다 드리고 목에 수건을 매드린 뒤에 식사를 받아서 천천히 떠먹여 드리는 것이다. 아 그나저나 할아버지, 할머니 식사는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건지 하루는 식사를 떠먹여드리다가 침이 입 밖으로 새서 머리를 때리며 침을 닦은 적도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그릇을 치우고 식탁을 정리하고 닦은 뒤에 행주를 모으고 약을 드셔야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약을 먹여드리고 배식 차를 식당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 그리고 병동 담당 의사 선생님이나 장기 봉사자들이 가도 좋다고 하면 새벽 봉사가 끝난다. 그러면 아침 식사까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는다. 처음엔 이 시간에 음료수를 하나 뽑아서 마시면서 소록도를 산책하기도 했었다. 피곤해서 그렇지 돌아다니다 보면 참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사진을 아무데서나 찍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소록도 사진이 부분적이거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이 있는 곳부터는 봉사자나 소록도 병원 관계자가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풍경들을 감상하면서 사색하는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피곤해졌고 나는 산책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에.

소록도에 있는 동안 자주 아침 일정이 바뀌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저녁 먹고 국토여행 연습 겸 단체산책을 하다가 나중엔 아침으로 바뀌었다. 새벽 봉사하고 와서 쉴 시간이 없어지자 난 더욱 더 피곤해졌고 새벽봉사를 하지 않는 친구들도 푸른 누리 때와 똑같은 얼굴과 말들을 하고 있었다. 소록도를 1시간 넘게 돌고 바로 아침을 먹으러 간다. 새벽일에 아침 산책까지 정말 허기져서 배가 부르도록 먹게 된다. 일하다보면 배가 많이 고프기도 해서 많이 안 먹어두면 계속 배고픈 채로 일을 해야 한다. 소록도 밥은 많이 잘 나오는 편이다. 봉사 교육 같은 걸 받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병원이나 마을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지원되는 돈보다 봉사자들에게 더 많은 돈이 든단다. 누가 누굴 도우러 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침 일정이 시작되면 다시 자기가 맡은 곳에 가야 한다. 마을에 가는 친구들, 호스피스에 가는 친구들, 노인 병동에 가는 사람들이 나눠져서 간다. 노인 병동에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대소변 보는 걸 도와드리고, 사와 달라는 물건을 사드리고, 먹여 달라는 음식을 먹여 드리고, 목욕 수발을 하고, 책을 읽어 드리고, 휠체어에 모신 뒤에 바깥 산책을 시켜드렸다. 바깥 산책을 나오면 나도 좋다. 약간은 답답한 병동에서 나와 공기도 마시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야기 하면서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추위를 잘 느끼시는 것을 대비해 담요로 덮어드리고 소록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도 정말 잘 간다.

한 번은 자기 아들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할머니를 모시고 ‘동생리’라는 마을로 갔었다.(소록도에는 중앙리, 동생리, 새마을, 신생리, 중앙리, 구북리 등이 있다.) 그런데 할머니가 마을 위치를 잘못알고 계셔서 다른 마을로 한참을 돌았다. 덕분에 소록도 끝에 있는 구북리 까지 다녀왔는데 그곳엔 높은 경사의 길이 많아서 혼자서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휠체어를 조심해서 몰아야 했다. 할머니가 혹여 나 때문에 다치시면 어쩌지 하는 상상을 하다가 눈물까지 나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저녁 식사 수발까지 마치면 봉사자들의 할 일은 끝이 난다. 저녁 먹고 일지를 쓰면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

마을로 옮기고, 인과응보인가, 어쿠,,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천성이라도 있는 건지 나는 열흘정도 있다가 신생리로 옮겨가겠다고 지원했다. 아무나 지원해서 막 가는 건 아니고 마지막 주니까 혹시 옮겨볼 생각 있는 사람이 없냐는 이야기에 대번 이동해버렸다. 이유는 정신 병동과 노인 병동 합쳐서 2주간 있었고 마을에도 있어보고 싶다고 그랬다. 그러나 병동에서의 일이 너무 힘든 반면 마을에 있는 친구들은 너무 쉽다는 이야기도 많아서 좀 쉬엄쉬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간 날부터 이 마을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일이 없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청소 해드리면 “피곤 할 테니 자고 가라.”는 관용적인 마을이 급 돌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내가 간 날 당장 나와 웅섭이를 돼지우리 앞에 있는 수도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삽을 주시며 땅을 파라고 하셨다. 축사 관리를 깨끗하게 안 하시는지 축사에선 엄청난 냄새가 났고 우린 머리가 핑 도는 상황에서 삽질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파니 막 헛구역질이 나왔다. 게다가 그날따라 유난히 날이 더웠다. 제기랄 인과응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건 왜였나.

한참을 파니 수도관이 나오긴 했는데 이장님이 새 수도관을 들고 와서 이것저것 재시는 것 같더니 이내 수고했다면서 난데없이 “도망가면 담당 봉사자에게 알리겠다.”며 기다리라신다. 우리는 너무 황당해서 픽하고 웃으면서 기다렸다. 오, 이게 웬 일? 이장님이 사이다를 사다 주셨다. 신나게 마시고 돌을 캐려니까 집에서 얼음물도 들고 와서 주신다. 그러나 땡볕아래 세 시간 삽질과 더불어 가뭄에 단비 같던 사이다가 또 다른 복선이었음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우린 기분 좋게 일단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고 오자 이장님은 우리를 반갑게 맡이 하시면서 음료수를 건내셨다. 우리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리곤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셨다. 와우, 반전 드라마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 우리의 도착지는? 이장님 집 뒤뜰에 있는 마늘 밭이었다. 다들 “뽑아줘!”라고 말하듯 땡볕 아래 수 백 개의 머리가 보였다. 다시 이장님은 “빨리 수확해야 한다.”고 하시더니 또 다시 "도망가면 알리겠다." 협박 아닌 협박을 하시면서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신다. 나와 웅섭이는 “낚였다.”라는 생각에 일하면서 한참을 웃었다. 게다가 “도망가면 알리겠다.”는 이유 모를 협박까지 듣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장님은 우리에게 “그래 일을 즐기면서 해야지.......”하시면서 “그래도 집중해서 일하라.”신다. 그렇게 황당한 마늘 밭은 처음이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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