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5] 본질에 집중하자

권정생 선생의 집을 찾았다. 아주 작았다. 거대한 건물이 가득한 도시와 다른 공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집 한 채였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 전부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다를 것이다.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작음이 아니라, 선생의 진실함과 소박함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 그것을 보아야 했다.

유럽의 중세는 흑사병으로 힘들었다. 의사는 너무나 부족했다. 의사라 해도 그 의술 수준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렇기에 중세 대학은 모두 의학부를 마련해 전문 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진정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몸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였다. 수도원과 성당이 병원을 마련하여 환자를 받았지만, 모든 병원에 의사가 있지 않았다. 의사 없는 병원이 허다했다. 먼저 병에 걸려 온 환자가 다른 환자를 진단하고 수용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으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초라한 병원이었다. 거기에 자비를 들여 마지막까지 간호한 이들의 헌신이 있었지만, 그 헌신으로 해결하기에 흑사병은 너무나 무서운 질병이었다. 의사가 필요했다. 이슬람으로부터 선진 의학을 수입하고 교육하여 능력 있는 의사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시대적 요구였다. 이런 노력으로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의 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중세의 병원은 정말 초라했다.

힘든 상황에서 당시 의사와 병원은 진지하게 자신들의 본질을 고민했다. 과연 무엇이 병원이고 의사인가 그 본질을 고민했다. 의사의 본질은 의술로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픔을 덜어 주는 사람이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그 아픔을 덜어 주는 사람이 의사였다. 그것이 의사의 본질이었다. 그 본질이 구현되어야 의사였다. 당시 유능한 외과 의사였던 앙리 드 몽빌(1260-1320)은 가난한 이를 치료할 때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치료하고 부유한 이를 치료할 때는 더 많은 비용을 청구하라 했다. 치료비를 마치 부유세와 같이 계산하란 말이다. 왜일까? 동일한 치료비는 경우에 따라 가난한 이에겐 그 자체로 고통일 수 있다. 즉 치료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 수 있다. 물론 가난한 이들에게도 높은 치료비를 청구한다면, 병원과 의사는 더욱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와 병원의 본질은 아니다.

▲ '중세 의사와 환자', 의사가 환자의 오줌을 담은 병을 들고 있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4세기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는 병자라면 그 병자가 그리스도교인이나 유대교인 혹은 다른 이교도라도 구별이나 차별 없이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아픔 앞에 종교의 차별은 없어야 했다. 대상이 부자든 가난하든 혹은 귀족이든 노예든 차별 말고 우선 의사는 치료해야 한다. 아픔 앞에 종교도 사회적 배경도 중요하지 않다. 우선 그 아픔과 함께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시급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의사다. 3세기 흑사병이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 유행할 때를 보자. 당시 그리스도교인은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아픈 이들의 고통과 함께했다. 이런 모습에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을 ‘파라볼라니’(parabolani), 즉 ‘무모한 사람’이라 불렀다. 전염될지 모를 상황에도 타인의 아픔만을 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무모한 사람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등장한 것이 중세의 병원이다. 병원은 환자 앞에서 계산하지 않고, 그 사회적 종교적 배경을 따지지 않고 그 아픔을 덜어 주기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의사와 병원의 본질이다.

실제로 중세의 병원은 교회의 도움 속에서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환자의 아픔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본분이라 생각했다. 비록 아주 큰 거대한 병원은 아니었지만, 아픔을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교회는 병원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변한다. 16세기 이후 하나의 단일한 그리스도 교회가 사라진다. 신교 구교로 나뉜다. 그러면서 병원을 향하던 기부금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병원은 경영난을 경험하게 된다. 또 계몽 군주라는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큰 준비 없이 거대한 대형 병원을 세웠다. 거대한 병원의 목적은 많은 환자의 온전한 치료가 아니었다. 권력자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통치자인지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본질이 병원이라기보다는 통치자의 과시용이다. 큰 병원을 세우고 준비되지 않은 의사들이 수천 명의 환자들을 돌보게 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온 병원에서 전염병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보아야 할 것보다 보이는 것에 집중한 탓에 병원은 치유의 공간이 아닌 아픔의 공간이 되어 버린 셈이다.

파라볼라니, 전염의 위험에도 타자의 아픔 앞에서 그 아픔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한 ‘무모한 사람’들의 병원은 눈에 작게 보였다. 처음엔 성당과 수도원의 한쪽 구석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작기만 했다. 하지만 아픔을 외롭게 홀로 두지 않은 공간이었다. 대단하게 보이지 않지만, 타인의 아픔을 덜어 주는 곳이라는 병원의 본질이 온전히 발현되는 공간이었다. 지금의 병원을 보자. 거대하다. 엄청난 의술을 자랑한다. 그러나 병원의 본질은 어쩌면 중세 ‘파라볼라니’의 병원에 비하여 초라할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은 대단하지만 정말 보아야 할 것은 초라할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선 눈에 보이는 병은 치료하지만 또 다른 아픔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을지 모른다.

본질에 집중하자.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본질이다.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본질이다. 본질에 집중하자. 병원이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보이는 것에 집중할 때 병원은 또 다른 아픔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된다. 종교도 정치도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정치인은 사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공익을 위해 있어야 한다.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정치도 종교도 그 본질에서 벗어날 때, 타인을 힘들게 하는 아픔의 수단이 된다. 보아야 할 것보다 보이는 것에 집중한 탓에 근대의 병원이 치유의 공간이 아닌 아픔의 수단이 되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기억해야 한다. 본질에 집중하자.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