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입니다.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합니다. 참 스승이 없는 시대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정말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자락을 붙들어줄 스승이 없는 삶, 그 마음자리가 얼마나 팍팍한지요?

권정생, 스승의 날을 맞아 그를 떠올려봅니다. 우리에게 <강아지똥>, <몽실언니>, <우리들의 하느님> 등으로 이젠 너무나 익숙해진 그 이름. 그 병든 몸 버리고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 당신이 가신 지도 내일 모레면 2주기입니다. 모든 것 버리고 훌훌 날아가 저 하늘의 별이 되고, 달이 되신 선생님, 우리시대 참 스승의 모습을 보여준 당신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세상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세상이었는데, 우리네 세상은 왜 이리 걍팍한지요? 선생님이 보여주신 세상의 존재들은 모두 저 위대한 시인 백석이 들려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그런 존재들이었지요.

스승의 날인 오늘 선생님을 조용히 불러봅니다. 당신이 남기신 수많은 생명들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그러나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고 그리고 선생님의 눈길이 가닿은 가난하고, 느리고,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당신이 남기신 “강아지똥”을 시인 백창우는 이런 노랫말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 내가 품은 씨앗 하나 / 샛노란 민들레로 피어나는 날 / 세상엔 무엇 하나 / 쓸모 없는 게 없다는 걸 / 나 같은 강아지똥도 / 쓰일 데가 있다는 걸”

세상은 이렇게 선생이 남기신 뜻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가 봅니다. 이렇게 점점 더 선생의 뜻을 세상 사람들이 알고 따르게 된다면 이 세상은 예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있겠지요.

▲ 손문상 화백이 그린 권정생, 권정생의 따뜻한 세계가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보릿짚 깔고
보릿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그리고
코로 숨 쉬고

엄마 꿈 꾼다.
아버지 꿈 꾼다.

- ‘소1’ 중에서

소는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소는 가슴속에 하늘을 담고 다닌다.

- ‘소4’ 중에서


선생님이 남기신 ‘소’라는 시입니다. 당신의 소처럼 이렇게 착하게 살 수는 없을까요? 언제나 가슴에 하늘을 담고 살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선생님은 그저 착하게만 살라 하진 않으셨지요?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언제나 소신을 밝히시며 ‘위대한 부정의 정신’을 보여주셨지요? 그래서 이 나라가 국익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앞세워 명백한 침략전쟁인 이라크전쟁에 파병을 감행했을 때, 그 국익의 단물을 빨아먹고 사는 우리에게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 하시며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승용차를 버리라"며 일침을 가하셨지요.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그는 탐욕과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이 세상의 전복을 꿈꿨다. 이 세상의 한 구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반역을 꿈꿨다. 욕망의 체계인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무욕, 절제, 가난을 무기로 정면 대결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하느님>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책에는 “함께 일해 함께 사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면 올바른 사회주의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는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왜 그의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닌 평화를 느끼게 할까. 그에게 소멸은 무엇이기에 슬프기보다 아름다워 보일까. 한 줌의 흙, 한 포기 풀과 같이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싸움이라는 삶이 끝났을 때라야 평화라는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자에게만 돌아가는 휴식이다.

- <경향신문> 이대근

선생님이 남기신 ‘소’라는 시입니다. 당신의 소처럼 이렇게 착하게 살 수는 없을까요? 언제나 가슴에 하늘을 담고 살 수는 없을까요? 그러나 선생님은 그저 착하게만 살라 하진 않으셨지요?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언제나 소신을 밝히시며 ‘위대한 부정의 정신’을 보여주셨지요? 그래서 이 나라가 국익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앞세워 명백한 침략전쟁인 이라크전쟁에 파병을 감행했을 때, 그 국익의 단물을 빨아먹고 사는 우리에게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 하시며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승용차를 버리라"며 일침을 가하셨지요.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강아지똥’과 ‘시궁창에 떨어진 똘배’, ‘금이 간 바가지’, ‘눈이 보이지 않는 지렁이’, ‘생쥐’ 등 이 세상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영원한 친구셨던 선생님. 당신이 오늘 유난히 그립습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 2008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우리들의 하느님》중에서

제 작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수많은 귀한 것들을 되살려놓고 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라고 가르치시고 가셨습니다.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온몸으로 가리치시며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버”리셨습니다.

그래요. 선생님, 이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자에게만 돌아가는” 그 달콤한 휴식을, 선생님이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셨던 당신의 어머니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목생이 형님과 편히 쉬십시오.

어머니는 자주자주 하늘 보실까
어머니는 자주자주 달 쳐다보실까
거기엔 정말 전쟁이 없었으면
빼앗아만 가는 임금도 없었으면
전쟁에 쫓겨 쫓겨 가지 않았으면
모두가 자유롭고 사랑이었으면
톳제비나 물레귀신 말고는
무서운 것들이 없었으면
거기에도 봄이면 진달래꽃 폈으면
꾀꼬리가 울었으면
골목길에 엄마닭이 병아리 데리고 다니고

▲ 작년 땅과자유학교에서 함께한 선생의 생가방문, 툇돌 앞에 선생을 추모하는 책을 두고 왔다.

감나무에 족두리 같은 꽃이 폈으면
창포꽃이 피고
그네 뛰는 단오날이 있었으면

응숙이네 머슴, 장수 아저씨랑
군마 할아버지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살았으면
송아지도 있고 망아지도 있었으면
실개울엔 가재도 살고 우렁이도 살고
버들가지도 흔들리고 물총새도 날고
흰구름 동동 뜨고 제비가 날고
뻐꾸기가 자꾸자꾸 울었으면
아아, 거기엔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부자가 없어, 그래서 가난도 없었으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으르지도 않고 겁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주리를 틀지 않았으면
소한테 코뚜레도 없고 멍에도 없고
쥐덫도 없고 작살도 없었으면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우리들의 참 스승, 권정생이 원하는 세상, 이 시속의 이런 세상은 언제나 올까요? 내일 모레면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선생님 누우신 빌벵이 언덕에 소주잔이라도 한잔 올려야겠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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