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20차 촛불집회를 가지 못했다. 날이 풀리면 참석하리라 다짐했지만 약속 자리를 함께 한 이의 위로로 대신해야 했다. 그 전날,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퇴임을 사흘 앞둔 이정미 헌법재판관이 주문을 낭독한 뒤, 식구가 없는 텔레비전 앞에서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쳤을까? 하루가 지나도 목이 컬컬하고 손바닥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경험 많은 재판관들의 이성을 믿었기에 탄핵 인용을 내심 확신했지만,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왜곡되는 판결을 하도 보아서 그런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이가 많을 텐데, 탄핵이 확정된 순간, 광장의 젊은이처럼 기쁨을 발산한 것인데, 며칠 지나면서 차분해진다. 박정희 체제의 종언을 의미하는 촛불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근원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탄핵 순간부터 언론들은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들의 면모와 약속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비교하는데, 촛불의 의미와 가만히 중첩해 본다. 그들의 약속들은 촛불의 명령을 수렴할 자세를 가지고 있을까? 박정희 체제의 종언에 부합하는 자세일까? 후보는 물론이고 후보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의 됨됨이와 경험을 비판적으로 살피니 긍정하기 어렵다. 광장에 나온 유권자의 판단을 어지럽힌다.

▲ 후보들은 당선 뒤 민주주의를 반영하며 약속들을 실행할까?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비선 실세를 동원하는 표독스런 독재는 반복되지 않겠지만 촛불은 그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민(民), 다시 말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는 비로소 지평을 열 수 있을까? 후보들의 약속은 쏟아지는데, 그 약속들은 당선 뒤 민주주의를 반영하며 실행될 수 있을까? 표를 의식하는 약속이 남발되는 시기라는 걸 양해하고 싶지만, 상당한 약속은 촛불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 아이와 광장에 나온 민중은 자본이나 권력을 호명하지 않았는데, 민중을 다시 소외할 약속들이 허공을 점유한다. 백댄서의 추임새 같은 맹목적 구호는 비판을 봉쇄할 태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국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촛불은 숱하게 되물었다. 후보들은 촛불이 누구에게 물었다고 생각하는가? 진실은 침묵하지 않는다고 했거늘, 민중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천명했거늘, 후보들의 자세에서 촛불의 정신을 온전히 읽기 어렵다. 선거철이면 시장 바닥에 넙죽넙죽 큰절 마다하지 않던 선량 후보의 민망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촛불의 준엄한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살피려는 자세와 거리가 먼 약속들이 선거 분위기를 선점하려 아등바등하고, 때로 거들먹거린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6주년이 된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 봇물처럼 쏟아진 유권자들의 요구는 무엇일까? 내용은 다채로워도 정치권이 무엇을 해 달라는 특정 계층의 이권과 거리가 멀다. 자식 키우는 민중이 정의롭게 참여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살피지 않았던 분야의 정책을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논의하자는 광장의 외침이다. 비선실세와 자본, 정치세력과 기득권의 이해를 우선 배려하려고 민중을 소외해 왔던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함성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덮어 놓고 거론하는 국가발전과 성장 약속은 누구의 몫에 우선하는지 진정성 있게 고민해야 한다. 새만금 개발과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도입은 장차 민중이 향유해야 할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줄까? 핵발전소와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그리고 4대강 사업은 어떤가? 촛불의 정신을 잇는 대통령을 지향하는 후보라면 반드시 살펴야 한다. 그런데 후보와 더불어 시방 후보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들은 촛불의 명령을 수용할 자세로 충만한가?

▲ 대선 후보들은 다음 세대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 생태 정의를 생략하면 안 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지난 정권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거론되는 경제성장과 개발과 일자리 확보 약속은 진정 촛불 정신의 훼손 없이 수용될 수 있을까? 화석연료 과다 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상이변은 이제껏 추진해 온 경제성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의 열매는 희생이 강요된 민중의 몫과 거리가 멀었다. 토해 내는 약속들은 지난 정권과 얼마나 다르게 실현할 것인지, 다르다면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를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 불쾌했던 숱한 경험을 이번에도 잊어야 하나?

경제성장은 석유의 뒷받침 없으면 불가능한 가정인데, 세계의 석유 보유량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자급자족 기반을 턱없이 잃은 식량도 석유 없이 생산은 물론 수입도 여의치 않을 텐데 후보들은 어떤 약속을 준비하고 있는가? 매장량이 바닥을 보이기 무섭게 가격이 치솟을 석유는 머지않아 수많은 일자리를 절벽에 떨어뜨릴 텐데, 이후의 대책은 무엇이어야 할지 경제성장을 되뇌는 후보들은 고민하고 있는가?

촛불의 요구는 근거 없는 신기루로 유권자를 유혹하는 구호와 대체로 거리가 멀다. 민중의 다양한 논의를 차단하는 데 자신의 이력을 소비한 자들을 측근으로 띄우며 경제성장과 석유가 뒷받침할 일자리를 들먹이는 후보들의 약속이 난무하는 상황이 실로 걱정이다. 정의로운 논의가 전제되지 않는 약속은 비선실세를 동원하는 독선보다 나을 거란 확신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표독스런 독선보다 점잖거나 부드러운 고집이 조금은 낫겠지만 촛불의 정신에 만족스러울 리 없다. 광장의 촛불은 다음 세대의 행복을 행한다. 다음 세대가 행복하려면 정치나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정의로워야 한다, 다음 세대의 건강을 위해 추가할 사항이 있다, 생태 정의를 생략하면 안 되는데, 시방 후보들은 생태 정의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거 같다. 그래서 촛불 이후를 기대하면서도 무척 불안하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