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욱 선생의 학교]

한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 한 개의 계단에 한 발이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겨우내 먹어서 토실해진 탓인지 술에 취한 탓이었는지 모르겠다. 내 왼쪽 발목은 그 짧은 시간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꺾여버렸고 그대로 바닥에 쾅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 계단에서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데굴데굴 굴러서 남은 계단을 내려올 뻔 했으니 말이다.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왔다. 밤새 끙끙거리다 다음날 병원에 가 보니 발목 인대 부분 파열, 왼쪽 고관절 타박상이었다. 2주 이상 깁스를 하고 그 뒤에도 보호대를 하면서 지속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운동을 하려면 8주 정도는 지나야 한다며 운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그렇게 2주 동안 목발을 짚어야만 했다.

2월 말에는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다. 새롭게 동학년이 된 선생님들과 인사부터 하고 1년 동안의 대략적인 계획을 함께 논의하고 세워야 한다. 새롭게 배정받은 교실로 이사도 해야 하고 정리도 해야 한다. 도와줄 아이들도 없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나는 단순히 걷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숨쉬고, 걷고, 마시고, 먹고, 씻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해 오던 일상들이 사실은 가장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일상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다쳤나 보다 라며 위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없다고 병가를 내고 마냥 치료에 전념할 수도 없었다. 3월에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조퇴를 하더라도 일단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꾸역꾸역 출근을 한 나는 학교 건물 앞에서 새삼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는 교실은 5층. 그런데 우리 학교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건강하던 시절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온 마음으로 엘리베이터가 간절하지는 않았었다. 그냥 우리 학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며 쿨(?)하게 인정하고 말았었는데 지금 나는 당장 목발을 짚고 5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올라간다고 끝이 아니었다. 교무실은 2층, 급식실은 1층이었다. 죽으나 사나 목발을 짚고 업무 때문이건 밥 때문이건 하루 종일 건물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했다. 순간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른인 나도 하루하루가 막막한데 다치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도대체 우리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도대체 엘리베이터는 왜 없는 거지?

우리 학교는 수도권 도시에 있으면서도 앞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산이 있다. 보기 힘든 자연 환경 속에 있는 덕분인지 아이들도 어딘지 모르게 도시보다는 촌에 가까운 순진한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자연 환경 덕분에 아이들은 산에 오르기도 하고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논길을 따라 산책을 나가기도 하는 등 다양한 친환경적 교육 활동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함정이 하나 있었다. 학교 위치가 이른바 개발제한구역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 학교에는 체육관도 지을 수가 없고 그 작은 엘리베이터 하나도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대규모 부지와 많은 예산이 필요하고 운동장도 작아지는 체육관이야 그렇다 쳐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이동권을 위한 엘리베이터 하나도 설치할 수가 없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어떤 학교에서는 몸이 불편한 학생을 받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더욱 놀라운 것은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애초에 신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는 등 신체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입학이나 전학을 원하면 학부모를 설득하여 언덕길로 2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근처 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멀쩡한 몸으로 입학을 했다 하더라도 도중에 신체 장애를 입거나 장기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게 되면 아예 학교를 쉬든지 아니면 반강제로 정든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에서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다. ‘덤웨이터’라고 식당이 생기기 전에 급식차를 운반하는 화물용 작은 엘리베이터다. 그러나 사람이 탈 만큼 안전이 담보되지 않아 곳곳에 ‘탑승 금지’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고 그나마도 식당이 생긴 뒤로는 가동하지 않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우리 학교는 두 다리가 멀쩡한 아이들과 교사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사람이기 때문에 모두가 존귀하다. 인권이라는 말이다. 인권은 초등학교 6학년 사회 책에도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국가는 이것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하며 제도적, 시설적으로 설치, 관리,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국공립 초등학교라는 곳에서 개발제한구역이라는 이유로 이동권 확보에 가장 기초 시설인 엘리베이터도 설치하지 못하게 하고 학생들의 이동권과 학습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학교 아이들에 비하면 5층 건물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나도 잠깐 고생이야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라. 아이들이 장애를 입고 전학을 가고, 목발을 짚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계단을 5층까지 오르내리는 모습을 말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있고 제도가 생긴 것이건만 어떻게 제도 때문에 인간이 인권마저 침해당해야 한단 말인가?

비단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제도나 규칙들, 때론 교장의 판단 때문에 어이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지금이야 웬만한 학교에 겨울에 온수가 공급되지만 불과 몇 년 전 인천에서 근무하던 시절만 해도 한겨울에 아이들이 찬물로 걸레를 빨아야 했었다. 그때 순간 온수기라도 설치해 달라고 학교에 건의하자 교장이 거부했었는데 이유는 아이들이 뜨거운 물 때문에 데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뜨거운 물에 데이면 책임질 거냐고 묻는데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그렇게 치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온수를 사용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장실에는 전기온수기가 설치되어 있으면서 말이다.

▲ 어떤 학교에서는 전기요금 때문에 한겨울에 2시간 정도 제한 난방을 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학교는 일반 가정과 달리 교육용 전기요금이 적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용 전기요금이라 해도 정해진 예산이 턱없이 적기 때문에 냉난방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정해진 예산이라도 효율적으로 편성하여 전기 쪽으로 더 돌리면 되지만 그게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닌 경우도 많다. 워낙 예산을 빡빡하게 배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교장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아끼라고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천에서 마지막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터무니없는 전기요금과 교장의 철저한 에너지 절약 정신과 강요 덕분에 한겨울에도 2시간 정도 제한 난방만 실시했다. 결국 해가 별로 들지 않아 가장 추웠던 뒷편 건물 구석 교실을 사용하던 1학년 아이들 2명이 발가락에 동상이 걸리는 사고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학부모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그제서야 교장은 1학년에 한해서 난방을 실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번에도 정작 본인은 교장실에 대형 전기난로를 훈훈하게 항시 가동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도, 냉난방도, 자유로운 이동도 모두 인권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인권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책으로만 가르칠 뿐 정작 아이들이나 구성원의 인권과 관련된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부하거나 유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사고날까 봐, 돈이 없어서, 땅이 없어서, 돈과 땅이 있으면 개발이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 모든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을 벗어나거나 인간을 차별하거나 방치하는 제도는 제도가 아니라 악습이다. 새롭게 땅을 파헤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지어진 학교 안에 엘리베이터 하나 더 만들겠다는 것조차도 개발이라며 제한하는 제도는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

박근혜가 결국 탄핵되었다. 촛불의 1차 승리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땡! 5층입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울리는 날이 올 때까지 한번 싸워 봐야겠다.

 
 
채성욱 교사(루도비코) 
2003년부터 인천과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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