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교회] 5월 17일자 1019호 <평화신문>과 2648호 <가톨릭신문>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이 창간 21돌을 맞았다. <평화신문>을 제작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축하를 드린다. 작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평화신문>이 1988년 태동하게 된 시대적 상황과 당시의 교회언론 필요성 등과 견주어 본다면 <평화신문>의 창간은 척박한 교계신문 시장에 밥숟가락 하나 더 얹어놓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자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나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며 거듭해서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할 일이다. 더욱이 21년이란 시간은 그것을 잊어버릴 만한 시간도 아니며 이제 그 의미가 무르익는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신문>은 창간 21돌 특집호 1면에서 정진석추기경과 21살 청년들과의 대화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해석된다. <평화신문>은 32면으로 증면을 하면서 특집을 8~11면, 14~19면에 다양하게 편집하였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창간기념호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은 신문사 사장(편집인)의 ‘한 말씀’이다. 이것은 <가톨릭신문>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밥상머리’ 교육이 아무리 중요한들 아버지의 말이 아이들에게는 잔소리이기 십상이고, ‘말씀전례’의 하이라이트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제의 ‘한 말씀’이기가 다반사이듯이, 창간 특집호 신문을 펴보는 독자들은 늘 ‘한 말씀’을 듣는다. 의미 있는 날을 맞아 신문사 편집인이 독자들에게 드리는 인사의 자리는 신문사가 가고자 하는 비전을 겸손하게 말하는 자리가 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문사 편집인의 ‘한 말씀’이 독자와 세상에 대한 ‘훈수’ 혹은 직원조례용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오독일까?

올해 창간 21돌의 말씀제목은 ‘예술을 노래하며 외설을 즐김’이란 제목으로 통제 없는 자유와 탐욕을 나무라고, 분별력과 자제력 없는 세상을 나무라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즐기는 세태를 나무랐다. 모두 맞는 말이다. 작년 창간 20돌 말씀제목은 ‘동물의 왕국’이었으며, 재작년 창간 19돌의 말씀제목은 ‘너도 나도, 모두 변해야 삽니다’ 였다. 당연히 모두 맞는 말이다. 거듭거듭 <평화신문> 편집인은 이 악한 세대와 세상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나무라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신문>은 ‘바른 길’을 혼자서라도 가겠으며 하느님께 “이 나라, 이 민족을 기억해 달라”고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천주교회에서 많이 들었던 말의 반대인 “네 탓이요”라 하는 말 같아 영 거북한 것을 어쩔 수 없다.

<평화신문>은 창간 21돌의 특집으로 21명의 독자 의견을 4명의 기자가 정리하여 19면에 실었다. 참 소중한 목소리이며 귀한 자료이다. 의견을 낸 독자는 20대 3명, 30대 1명, 50대 10명, 60대 5명, 70대 1명, 80대 1명으로 40대 이하의 참여는 저조하였지만 교계신문에 대한 독자분포율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지역으로는 서울교구 3명, 광주-대구-수원-인천-원주교구 2명, 안동-전주-제주-부산-대전-청주-마산교구 1명씩 의견을 받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구독기간은 창간독자부터 1년쯤 본 독자까지 다양하였다. 독자들은 짧았지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독자들이 <평화신문>에 요청한 의견 중 일부 내용은 “읽을거리가 풍성한 신문, 신자가 아닌 사람도 가톨릭에 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접근하는 신문, 교회신문이지만 한쪽 입장만 싣지 말고 객관적으로 다루는 신문, 시골 본당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 일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신문, 교리지식에 약한 신자들을 위해서 아주 기초적인 내용도 알려주는 신문, 다양한 공동체 소식과 유명인사만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 이야기를 신경 쓰는 신문, 영성과 관련된 기사가 더 많은 신문,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 상업적 광고나 특정 업체의 지속적 광고를 지양하는 신문, 신부님과 수녀님 꼭지도 필요하지만 평신도가 이어가는 고정꼭지가 있는 신문, 가난한 집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신문,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계속 도와주는 신문”이다.

독자들의 의견을 옮겨 실은 <평화신문> 기자들의 선의가 돋보인다. 그 의견이 실린 19면의 제목은 ‘무엇을 원하는 지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였다. 신문사 편집인의 ‘한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말에 대한 경청이며 정성어린 실천이다. <언론과 교회>에서 1년 동안 비평한 것보다 독자들이 쏟아내는 이런 말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하늘은 때로 이렇게 어눌한 장삼이사의 말로 당신을 내어보인다. ‘강론’도 장소와 관계없이 하다보면 직업병이 될 수 있다.

그나저나 1920년에 같이 태어나 서로 갑장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친구이듯이, 1988년 5월 15일 같은 날 창간된 시퍼런 21살 동갑내기인 <평화신문>과 <한겨레>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사이가 되는 것은 꿈이런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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