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4] 윌리엄 오캄 2

‘자본주의’라는 틀을 고집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자본’만이 행복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돈이 없으면 불행해야 하고, 약해져야 하고, 심지어는 생존의 이유도 없다 생각한다. 모든 인간 행위는 자본이라는 목적을 향해야 한다. 자본과 무관한 행위는 무가치한 행위라 생각한다. 모든 가치는 자본으로 번역되어야 유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의미에서 자본은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연봉이 얼마인지 혹은 주택과 자동차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판단 기준이 된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자본으로 번역하여 이해한다. 소설가의 예술성도 그가 벌어들인 자본으로 번역되고, 철학자의 진지함도 자본으로 번역된다. 그러한 이유에서 자본과 크게 연결이 되지 않는 철학 따위는 사라져도 그만이란 식으로 생각한다. 21세기 사라져 가는 한국의 철학과가 어찌 보면 당연한 시대의 모습인 듯이 보인다. 모든 가치가 자본으로 번역되는 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 ‘소유’는 행복의 거의 유일한 근거다. ‘공유’란 막연한 이상일 뿐이다. 현실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공유가 아니다. 바로 소유다. 어린 시절부터 조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하기 위해 공부한다. 어른은 자본 가치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고, 아이는 자신의 성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한다. 결국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일하고 공부한다. 한마디로 더 소유하기 위해 산다. 종교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 눈에 더 크고 비싸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은 종교 자체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할 정도로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중세인에게 행복은 자기 본질의 온전한 구현함이었다. 철학자의 행복은 철학자를 철학자로 존재하게 하는 철학의 진지함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를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그의 행복과 가치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 이후 사람들은 실체적 본질의 온전한 구현이 아닌 자본으로의 번역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찾고자 했다. 종교인들도 종교인으로의 본질보다 자신이 가진 소유물의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오캄은 바로 그러한 종교인의 모습과 싸웠다.

교황 요한 22세의 시대를 보자. 그는 당시 민중의 존재론적 신성을 자각한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31개 명제로 정리하여 단죄했다. 또한 성직매매의 악습이 격심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더 부유해지려 했다. 임명된 주교의 첫 해 수입 전부를 교황청에 주었다. 이렇게 교황청의 재정은 점점 좋아졌다. 실재론은 감각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은 본질의 존재를 긍정한다. 감각되는 현실의 아픔을 이기고 살아가다 보면 죽어서 이루어질 또 다른 본질의 존재를 긍정하기 편한 존재론적 입장이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말이다. 그러나 유명론은 감각으로 다가오는 이 현실의 존재들, 즉 개별적 존재들을 더욱더 긍정한다. 감각되지 않은 변하지 않은 보편이 아닌 현실 속 작은 개체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 교황 요한 22세 시대에 교회는 더 부유해지려 했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오캄의 시대, 감각으로 다가오는 현실은 민중에게 가혹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이루어진 자본의 편리함이 누군가에겐 현실적 공포가 되어 다가오는 시대였다. 자본의 약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가는 시대였다. 바로 그때, 교회는 힘없고 작은 개별 민중의 아픈 현실이 아닌 자신들이 소유한 것의 가치를 자본으로 번역하기에 바빴다. 청빈을 강조하는 수도자들은 과격한 사상이라며 무시 받았다. 예수와 사도들의 삶이 소유에 매달리지 않은 공유의 삶이며, 청빈의 삶이란 것이 어색한 외침이 되어 있었다. 이러는 사이 누가 더 지상의 권력자인가를 두고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은 다투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다. 민중이 가난 속에 죽어가는 동안에도 말이다.

오캄은 이러한 시대, 이러한 종교권력에게 강하게 소리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란 세상의 권세를 탐하여 재산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 땅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온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서 오캄은 청빈의 삶을 강조했다. 교황과 주교 그리고 종교권력의 목적은 이 땅의 특권을 소유하고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였다고, 교회의 참된 권위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이러한 소유 혹은 자본으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다. 참다운 교회의 권력은 헌신과 봉사에 있다. 지상의 소유욕에 서로 싸우고 다투는 세상사에 속하여 승자가 되는 것에 종교의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소유욕으로 누려지는 것이 종교의 행복이 아니다. 교회의 권력은 가난하고 약한 민중들의 현실적 아픔을 위로하며, 그들이 향해야 할 그 영원한 삶, 그 참된 행복의 길을 안내함에 있다. 교황은 황제와 누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것인지 다투어 이김으로 그 권위를 증명하는 그러한 자리에 있지 않다. 교황은 더 많은 소유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그러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오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였는가의 물음으로 참된 교황의 가치와 권위가 드러난다고 보지 않았다. 이러한 소유욕으로 다투어 이김으로 참되고 바른 교황이 등장한 것이라 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참으로 진실된 교황의 모습은 오직 신자로 하여금 영원한 삶에 이르도록 헌신하는 모습에 있을 뿐이다.

요즘 우리는 국가권력과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다투는 교회권력을 보진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오캄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여전히 지구상 많은 종교 혹은 교회는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그들의 악행에 눈을 감는다. 거짓된 권력자의 희생양이 흘리는 눈물에 다가가지 않고, 권력자의 입이 되고 손이 되려는 종교인들이 제법 많다. 슬픈 일이다. 13-14세기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간다. 그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민중이 있었다. 오캄은 참으로 있는 것은 약하고 작은 민중 속 개인임을 존재론적으로 풀었다. 에크하르트는 그 작은 민중 속 개인의 신성함을 풀어냈다. 그 하나하나는 존귀한 존재라고 풀어냈다. 이제 존재론적으로 참된 존재가 되고 신성한 존재가 된 민중 속 개인은 사악한 국가권력과 교회권력에 소리쳤다. 민중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앉아 자신들의 소유욕에 집중하는 그 권력을 향해 소리쳤다. 참된 권위는 소유욕으로 채워지지 않음을 소리쳤다.

13-14세기가 아닌 2017년 지금 이 땅의 종교는 참된 종교의 권위와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여전히 종교는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번역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가운데 약자의 눈물엔 고개 돌리고 자신의 소유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듯하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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