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3월 5일(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비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40일 동안 준비하는 사순절을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의 충실함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막의 체험을 바로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세례와 연결하여 내놓고 있다. 세 복음사가들은 또한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서”(마태 4,1) 예수님의 사명이 시작된다고 마태오는 쓰고 있다. 40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했던 경험을 말해 준다.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세례 때의 결단을 더욱 강화시키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길을 열어 놓는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세 가지 유혹을 겪으며 예수님은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유대 민족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해 놓은 신명기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응답한다.

세 가지 유혹들은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조건을 이용하는 것을 극심하게 거부함으로써 제자들에게도 받은 은총을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쓰지 말라는 지침을 주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 위에 놓는 특권이 아니라 섬김을 의미한다.(마태 4,3-4) 예수님은 이러한 의미를 군중들과 빵을 나누면서 보여 줄 것이다.(마태 14,17) 그리고 나서 주님은 하느님을 시험하기를 거부하며, 믿기 위하여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항상 거부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치유들은 생명의 징표이며 권력의 과시가 아니다.(마태 4,5-7) 이 생명은 모든 형태의 죽음, 예를 들면 인류 안에 깃든 죄악(창세 3,1-7) 같은 모든 죽음에 저항하는 생명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이며(창세 2,7-9)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들어온 상황”(로마 5,12)을 정복할 것이다.

▲ '그리스도의 유혹', 아노니무스, 바실리카 디 산 마르코의 모자이크. (12세기)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권력의 유혹

세 번째 유혹은 역사와 하느님나라 선포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을 드러낸다. 성서에 보면 산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자리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는다.(마태 4,8) 그러나 이 권한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획과는 반대의 뜻을 갖고 있는 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마태 4,8) 이와 같은 유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받고 있는 유혹이기도 하다. 즉 섬김의 권한을 지배의 권력으로 잘못 이해하려는 유혹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왜곡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간에 역사적 실재를 하느님나라와 혼동할 수 없다. 하느님의 통치는 지금 이 순간 역사 속에 현존해야 하지만 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 그 너머에 있는 실재를 향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우리가 거부하고 있는 것과의 제휴는 역사적 성취를 추진하는 지도자들을 지배하는 군주들로 변질케 할 것이다. 그 대신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다.(마태 4,10)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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