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2월 27일(현지 시간) 제34차 유엔 인권이사회 고위급회의 기조연설에서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은 대북 비난과 함께 북한의 심각한 인권 피해가 더 큰 재앙을 초래하기 전에 독자적, 집단적 조처를 해야 한다며 기염을 토했다. 비슷한 시각 대한민국 국방부는 롯데와 부지 교환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사드(THAAD)의 실전 배치가 임박했음을 알렸고, 이에 중국 외교부는 사드 배치로 발생하는 모든 뒷감당은 미국과 한국의 책임이라며 강도 높은 보복을 암시했다. 부지 공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 국토를 다른 나라 군대에게 내어준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한반도가 본격적으로 분쟁지역화될 위험이 높아짐에도 외교부가 실마리를 풀어낼 역할을 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다.

애초에 사드 배치 결정을 발표하던 날에도 외교부 장관은 백화점에서 바지 쇼핑 중이더니, 남북한뿐 아니라 미, 중, 러, 일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이 시점에도 북한에 대한 제재와 처벌을 주장하느라 첨단무기 배치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 따위는 신경 쓸 여유가 없나 보다. 말하자면 미운 놈 때리는 데 정신 팔려서 제 목 밑에 칼날이 들이닥친 것도 모른 척하는 형국이다.

일찍이 통일부총리를 지낸 한완상 선생은 남북한 정권의 관계를 적대적 공생관계로 규정한 바 있다. 남북한 정권이 서로에 대한 공격과 갈등을 통하여 내부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이어 나가는 현상을 꼬집은 말인데, 오늘날 적대적 공생관계는 남북한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인 것 같다. 어차피 참다운 친구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항구적 전쟁 상태에 있으니 (그래서 우리는 툭하면 ‘전사(戰士)’가 되지 않는가. 입시 전쟁 중인 아이들부터 태극‘전사’에다 취업 전쟁까지) 우정도 형제애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뒷전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지금 당장 내 분노와 적의를 대신해서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할 수 있으면 누구라도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경우도 쉽게 본다. 태극기를 휘감은 채 영대에 장백의를 입고 단상에 오르는 노 사제가 있는가 하면, 평소 ‘떡검’이며 ‘기레기’를 비난하다가도 자신과 ‘수틀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서슴없이 꼬리를 흔드는 꼴사나운 광경도 드물지 않다. 그만큼 사회 전반에 분노와 적의의 농도가 짙어졌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문제는 분노와 적의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 누군가는 ‘부수적 피해자’(Collateral Damage)가 되어 속절없이 희생양으로 내몰리고 만다는 것이다.

▲ 사드의 실전 배치가 임박했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북한 정권의 비도덕성과 반인권적 행태를 지적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 할지라도, 강경책 말고는 내어 놓을 것이 없는 빈곤한 상상력은 대북 제재가 가져올 무고한 희생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대북 제재를 외치면 순간 통쾌하게 들리기는 하겠지만, 그 첫 번째 희생양은 북한의 어린이들과 노약자 같은 가장 약한 이들이 될 것이다. 국제적 경제 봉쇄와 제재로 인해서 북한의 방역체계가 무너지고 식량 사정이 악화될 때 그 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또 그렇게 자식이 굶고 병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이북의 부모들이 사무치는 원한과 증오의 칼날을 벼리게 될 때, 깊어지는 동족 간의 골은 어떻게 메워 낼 수 있을 것인가.

국내 사정으로 눈을 돌려도 비슷한 모습을 흔히 본다. 내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누구와도 손을 잡고 적의 무릎을 꿇리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과연 ‘부수적 피해자’에 대해 한 번이라도 숙고해 보았을까.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이 내신 인간의 존엄함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끊어서는 안 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무죄한 희생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는 어떤 상황에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삼대 세습의 수준 이하 정권이 벌이는 짓이 아무리 밉다 하더라도, 애먼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생존을 위협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내 정적이 아무리 밉다 해도 애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귀한 창조물인 인간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으로 제시한 바 있다. 집단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야심 같은 것 때문에 몇 사람의 희생쯤 아무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스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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