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2월 26일(연중 제8주일) 마태 6,24-34

마태오 복음이 그리는 예수는 가르치는 스승이다. 유대 사회에 던져진 예수의 가르침은 그 사회가 지닌 지식이나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다른 관점으로 율법과 예언서를 해석하고 가르쳤다. 이를테면 예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세상이 익숙하게 오랫동안 바라본 관점과 판이하게 달랐다.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면 먹고 사는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하늘의 새나 들에 핀 나리꽃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필요로 하는 존재지만, 그 필요함이 존재의 목적이나 갈망이 아닌 예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제 종류대로’ 그 가치를 살아 내는 것이다.(창세 1장 참조)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제 종류대로’의 가치를 확고히 하는 데 소용된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집중하여 가르친다.(5,17-6,34)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바로 ‘제 종류대로’의 가치를 지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대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비롭게 다가서는 것으로,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의로움이고, 그 결과는 각자가 존중받고 배려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 서로의 관계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경쟁하게 만드는 건 하늘 나라의 의로움을 짓밟는 행위가 된다.

▲ 우리가 먹고 사는 데 목매다는 이유는 먹고 살기 힘겹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물론 먹고 사는 것이 안정이 되어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들은 대부분 먹고 사는 데 힘겨웠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들려질 예수의 가르침은 비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느님이 다 채워 주실 것이니, 현실을 걱정하지 말라는 식의 가르침은 현실을 포기하고 저세상을 꿈꾸며 살라는 말로 들렸을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의 가르침이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가 먹고 사는 데 목매다는 이유는 먹고 살기에 힘겹기 때문이다. 누가 힘들게 했는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가 힘들게 하는가. 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든 그런 세상을 만드는 건,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지극히 현실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가 북유럽의 선진국을 만들기도 하고, 대한민국처럼 지독히도 자본의 무게에 억눌린 나라를 만들게 된다. 빵을 던져 주고, 일자리를 던져 준다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빵과 일자리를 누리고 사는 우리 각자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고민하고 사유해야만 인간은 ‘제 종류대로’의 가치를 이해하고 제 삶을 제 가치대로 살아가게 된다.

나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 이제 대립과 저항의 목소리에 우리 각자의 고민과 사유를 담아내야 한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취해 잠시 제 삶을 잃어버린 우리는 또 다른 돈과 명예와 권력에 의지하기보다 제 삶이 진정 바라는 것을 외치고 찾아가야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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