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2월 26일(연중 제8주일) 마태 6,24-34

우리는 산상설교를 계속 읽고 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있는 두 가지 중심적 확신들을 보여 준다.

우상숭배의 위험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우상숭배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위협이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우상숭배를 고발했다. 주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예외적으로 강력하게 지적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돈”이란 단어는 아람어인 Mamonas를 번역한 말인데, 불의하게 획득한 재물을 다른 이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쓰고 우상으로 섬기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하여 절대적(배타적) 선택을 요구한다. “사랑”과 “미움”이란 단어들은 결정의 명확한 속성을 강조하는 단어들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는 “섬기다”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에는 숭배, 예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거기에는 또한 재물을 섬기는 위험이 있다. 맘몬을 섬기는 것은 재물을 하느님의 대안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정확하게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실천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돈에 넘기고 돈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택일은 하나나 혹은 다른 하나에 대한 섬김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어떤 형식적 선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살아가는 구체적 방식에서 보여진다.

▲ 돈(Mamonas)은 불의하게 얻은 재물을 다른 이들을 억압하기 위해 쓰고 우상을 섬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느님나라와 의로움

마태오는 이러한 관점을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라는 은유에 근거하여(마태 6,25-34)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아름답게 표현하며 강조한다. 이것은 변덕스러운 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자유에의 초대다. 우리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시는(이사 49,14-15) 분,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섭리의 보살핌에 두고 그분과 가난한 이들을 자유롭게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으로서의 과제와 그것들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무시하는 일도 아니다. 반대로, 마태오의 구절들은 주위를 돌아보고,(마태 6,26. 28) 관찰하고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우리는 분노와 불안으로 마비되지 않고 우리를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우선순위들을 세울 것이다. 마태오 복음은 주장한다: 걱정하지 마라, 쓸데없이 애쓰지 마라.(마태 6,25. 27-28. 31-32) 걱정하는 태도는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들 앞에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러면서 마태오 복음은 두 번째의 중심적 선언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하느님나라와 의로움: 어떤 의미에서 이 구절은 산상설교를 요약한다. 하느님나라의 선물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의로움을 실천하기를 요구한다. 이 기준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낼 것이다”(1코린 4,1-5) 하느님나라의 은총은 다른 이들과, 특히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우리들 간의 연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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