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2월 19일(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산상설교는 도전이며 동시에 영감의 원천이다.

율법주의로부터 사랑으로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의 다양한 가르침들을 제시해 왔다. 율법에 의하여 법전화된 공의에 대하여, 그분은 새로운 실천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하느님나라의 실천이다.(“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마태 5,20) 어떤 폭력의 형태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들 자신을 강요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상식이 제안하는 대로 혹은 율법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설립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응답할 것인가?

예수님은 강력한 세 가지 예를 제안한다 - 뺨을 맞는 것, 외투를 내주는 것 그리고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다. 세 가지 제안들은 어떤 형태의 저항이든지 모두 포기하는 것을 표현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상대방들에게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자세들이다. 그때는 아마도 거리를 두도록 하거나 개인적 재만남을 이끄는 때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달라는 모든 사람에게 주라.”(마태 5,42) 새로운 법, 새로운 조항, 새롭고 더 정확한 요구들을 첨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시도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에 머무는 것과 같다. 산상설교 전체에서 보는 것처럼, 문제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갖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재물과 우리의 삶을 평가해 보는 또 다른 방식을 갖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공격자까지 포함하여, 다 하느님의 성전이어야 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1코린 3,16)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결국 새로운 법에 따라오는 사랑이라는 동기이기 때문이다.

▲ 율법에서 사랑으로.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는 누구를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예수님이 제시한 일련의 규정들에 있어 정점은 마태오 복음 5장 43절과 44절에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적을 미워하라고 강요하진 않으나, 예수님은 모든 가족, 이념 혹은 국가의 장벽들을 지워 버린다.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잘못 대우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법칙들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러한 요구는 (모든 이전의 제안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하느님의 모범에, 모든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간에 그분의 자녀로 여기는 (마태 5,45) 아버지의 모범에 근거하고 있다. 이 무상의 사랑은 하느님의 현존으로 실제화되고 그 말씀은 예수님의 실천에 의하여 증명된다.

매우 단순하게, 우리는 레위기에서 읽는 것처럼,(레위 19,2) 아버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하고 자비가 충만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마태 5,48) 이 거룩함의 표현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레위 19,17)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부터 하느님의 태도를 따르고, 그분께서 하시는 것처럼 나누기를 감히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전적으로 충실하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전적으로 선하신 분이다. 모든 다른 것은 이 사실로부터 흘러나온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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