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3]

아브라함의 품 

예수가 언젠가 “부자와 나자로” 이야기를 전했다(루가 16,19-26) 호의호식하던 부자는 죽어서 지옥불로 떨어지고 천대받던 거지 나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해설하기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가난한 이가 보상받을 내세가 있다는 것과, 그 내세의 주인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예수 이전의 인물이다. 당연히 교회 공동체에 속했던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대인 아브라함이 이상적인 내세의 주인이자 주체처럼 등장하는 예수 이야기를 두고서, 초기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품’을 비그리스도교적 의인이 머무는 휴식의 장소로 여기기도 했다.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는 중간단계 쯤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도 부자와 나자로 이야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을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의인들이 머무는 중간적 휴식처(레프리게리움)라고 보았다. 신실한 영혼들이 머무는 잠정적 거처라는 것이다. 그 내세는 잠정적인 거처인만큼 가변적인 것이기도 했다. 죽는다고 내세가 대번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내세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를 이들을 위한 기도가 생겨났고, 그 기도가 그들을 영원한 하늘로 옮길 수도 있으리라 믿기도 했다. 자신의 조상이 혹시 그런 내세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니 죽은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의로운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세에서 예수를 믿었느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영원한 천국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후에조차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 단테의 <신곡> 중 한 장면. 연옥은 이승과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속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연옥의 성서적 기원 

서의 다른 구절 하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초 위에다가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고린 3,10-15) 

교회 공동체라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바울로의 권면의 일부인데, 여기에도 과도기적 내세와 같은 어떤 상태가 있는듯 묘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심판의 날에 몰려올) 불 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는다”(15)고 할 때의 ‘불’은 일종의 심판의 과정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한 ‘정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최종적인 구원은 사후 정화의 단계를 지나고서야 이루어진다는 듯한 이 구절에서 사람들은 내세에서도 사람의 운명이 바뀔 수 있으며, 내세가 일회적이거나 불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해석도 이끌어냈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가변적 내세에서처럼, 정화의 ‘불’이라는 표현 역시 죽은 이의 최종 내세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정당화시켜주는 구절로 작용했다. 이른바 “연옥”(煉獄)의 성서적 기원이 된 것이다. 

죽은 어머니를 위한 기도 

이런 시각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확립자라고 할 수 있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돌아가신 어머니 모니카를 위해 했다는 기도문에도 들어있다. 그 일부를 읽어보자: “ ... 저는 그녀(어머니)가 자비를 베풀었고 그녀에게 빚진 자들을 기꺼이 탕감하여 준 것을 압니다. 그녀가 만일 구원받아 깨끗해진 후 그 여러 해 동안 진 빚이 있다면 당신께서도 그녀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 탕감해 주소서. 주여, 탕감해 주시기를 간구하나이다! 그녀와 변론하지 마소서!(시편 142:1)...”(<고백록>, IX, XIII, 34-37)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지로 모르니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죄를 다 용서해 주십사 하는 내용이다. 그래야 온전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짓는다면, 기도의 내용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했다고 하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기도가 하느님을 움직여 죽은 이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옥 

물론 산자들의 대도(代禱)는 전적으로 악하거나 전적으로 선하지는 않았던 이들에게 적용된다고 그는 보았지만,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대부분 전적으로 악하거나 전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보니, 산자들이 사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인적 죽음과 일반적 심판 사이의 기간을 설정하기도 했는데, 어찌되었든 이런 입장은 점차 중간 단계로서 내세를 교리화할 수 있는 기초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민간 신앙에 퍼져있던 이런 식의 가변적 내세 개념이 교회에 공식 수용되면서 피렌체 공의회(1438-45)에서는 이른바 ‘연옥’을 정식으로 교리화하기에 이른다.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야훼께서 

생시의 신념이나 행동만으로 내세의 운명이 대번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이런 식의 견해는 인간의 구원, 특히 비그리스도교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그 최소한의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몫이지 사람이 결정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기도하고 요청할 뿐이다. 결정은 하느님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야훼께서!”(잠언 16,33; 16,1). 가변적 내세 개념는 필연적으로 특정 종파와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논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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