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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서 나가는 법[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63]

남편이 올봄 텃밭 농사에 대한 의견을 냈다.

던져만 놓으면 알아서 크는 상추랑 토마토 외에 두어 가지 작물만 더 농사를 짓자. 그래서 알찬 소출을 올려 보자고 했다. 이견이 있을 턱이 없었다. 몇 해간 우리 집에 불어 닥친 농사 열풍이 지나가고 욕심이라는 ‘거품’이 가라앉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겐 ‘겸손’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말할 때 떠오르는 ‘열정’같은 것이 꿈틀하고 살아났다. 올해는 토마토 열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줘야겠네. 그리고 그 열매를 하나도 남김없이 먹을 때쯤 오일장에 가자. 거기 씨앗과 어린잎을 파는 가게 앞에 서서 ‘어디 보자. 이번엔 어떤 걸 키워 볼까.’하고 입맛을 다시는 거지.

아아, 하지만 그러려면 나는 먼저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고해를 해야겠다.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우리의 텃밭에. 불같이 뜨거웠다 얼음같이 차가워진 텃밭 위, 가여운 배추들에게. 달고 연하게 잘 커서 김장 배추가 되리라던 배추 꿈나무들은 주인이 물 주는 것을 자꾸 잊는 바람에 질기고 맛없는 배추가 되고 말았다. 그리곤 외면 받아 거기서 얼어 죽었는데 어째서인지 아직도 푸릇한 기운을 잃지 않고 있다. 주인 잘못 만나서 고추장, 된장, 쌈장에 몸 한번 뉘어 보지 못한 그네들이다. 배추야, 배추야, 너희들 괜찮니? 혹시 너무 비참한 건 아니니? 하고 물으면 배추는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사실은 나한테 먹히느니 자신은 다음 세대를 위해 밭의 거름이 되는 것을 더 원했었다고. 그리고 그들 형제 몇이 아래 아래 할머니 집 닭 모이가 되기 위해 밭을 떠나던 날, 흙 묻은 얼굴이 환하게 빛나던 걸 보지 못했냐고. 모두 잠든 깜깜한 밤을 틈타 엄마 고라니가 아기 고라니를 데리고 와서 배추 잎을 와삭와삭 실컷 뜯어 먹이고 간 것도 몰랐냐고. 음, 이제야 배추에게 품었던 미안함이 좀 가시는 것 같다. 아니 이젠, 누가 “밭에 배추 왜 심어요?” 하고 물으면 “나 먹을라고 심지.” 하던 걸 “나도 먹고 땅벌레, 날벌레도 먹고 들짐승, 산짐승 할 것 없이 살아가는 누구라도 먹어 보라고 심는다.”고 뻥을 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도 올바른 발견인지.

마침 부엌 서랍장 위 식료품 더미를 파헤치던 남편도 무얼 발견했나 보다. 싹이 길게 자란 양파를 들어 올리며 남편이 말했다.

   
▲ 눈 내린 어느 날 우리 집 마당. ⓒ김혜율
“이거 못 먹겠지?.... 버릴까?”

나는 양파를 낚아채며 말했다. “아니, 놔둬.”

실하고 무거웠던 양파의 하얀 속살이 허깨비같이 가벼워져 새파란 줄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치 요정 다프네가 아폴로의 일방적 구애를 못 이겨 도망치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버리는 대신 월계수 나무가 되는 것처럼. 내게 양파의 변모는 그렇게 보였다. 아름다운 요정의 부드러운 젖가슴이 거칠고 딱딱한 나무껍질로 덮이고, 팔과 다리는 가지가 되고, 머리카락이 나뭇잎이 되는 것에 견줄 만큼 기막힌 일이었다. 나는 양파가 대파처럼 푸르러져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차마 그것을 버릴 용기를 낼 것이다.

나는 이다지도 싹을 틔우는 데 재능이 있다. 그게 틔우면 독이 되거나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문제지만. 양파 싹, 감자 싹, 고구마 싹, 당근 싹.... 싹 말고는 최근엔 조청 곰팡이와 딸기 곰팡이도 키우다 들켰다. 텃밭은 먹을 것 없이 황폐하고 부엌 냉장고 속이나 찬장 위 식료품은 깜박하는 사이 시들거나 썩어 간다.

집 바깥 외에 집 안쪽까지 번지는 이 게으름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무래도 우리 집에 손님이 오시면 좋을 텐데. 손님이 오신다면 나도 제법 정리 정돈을 한다. 시골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오는 손님이 실망하지 않게 텃밭 관리도 좀 하고, 부엌 찬장 아래 고구마 감자가 싹을 내기도 전에 모닥불을 피워 몽땅 구워낼 거다. 하지만 때는 아주 추운 겨울이고 손님은 뜸하다. 남편은 내게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일단 싹이 난 양파가 완전히 썩기 전에 버리기를 바랐다. 나도 얼마간 동의했지만 궁극적으로 좁은 집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건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수시로 더럽히고 갈아입는 옷가지와 별것도 없는 장난감과 아기 때 읽고 지금 읽어도 재밌는 책들과 그리고, 그들의 서투르지만 사랑스런 창작품들을 버리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집이 때로 난민수용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혼돈 속에도 질서는 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나한테 물어 보면 대개는 바로 찾아 줄 수 있다. ‘오븐 아래 수납장, 오른쪽 문짝 두 번째 칸 양파즙 바구니 안에 욜라의 다이노포스 가면이 들어 있어.’라는 식이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메리와 욜라, 로가 제각기 물건이 있는 장소를 바꿔치기 하는데다 미니멀한 삶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편이 대신 관련 책들을 사 모으는 통에 집이 더욱 어지러워지던 어느 날, 나는 어떤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다.

문제란 놈은 엉뚱한 곳에 해법을 숨겨 놓고는 자기에 대해 고민하는 이를 놀리는 재주가 있는데 우리가 그 꾐에 빠져 문제! 문제! 하고 발버둥 칠수록 문제의 구덩이는 더 깊어지기 십상이라는.

눈이 내린 뒤로 우리 집 마당은 줄곧 진창이다. 신발이 푹푹 빠진다. 그 마당이 햇볕을 받아 더욱더 물렁해지고 걸쭉해진 시각, 차를 주차하던 나는 마당 진흙 속에 차와 함께 묻힐 뻔했다. 진창에서 빠져나가려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니 타이어가 제자리에서 깊은 구덩이를 파며 돌았다. 특수 지형에서 작용하는 기계의 운동 메카니즘에 대해 경험이 부족한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엑셀을 더욱 세게 밟았고 급기야 만신창이가 되어 백기를 들고 도주했다. 저녁이 되어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저 마당 좀 어찌해 보라고 씨근덕 댔는데 작년, 재작년 이미 같은 경험을 해 본 남편은 자신 있다는 투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내 기억으로는 나보다 더 깊은 구덩이에 차바퀴가 빠졌고 성인 남자 두 명이 달려들어도 잘 안 되었고 지렛대까지 동원되어 겨우 차를 끌어 올렸던 것 같은데.

   
▲ 눈 내린 어느 날 우리 집 마당. ⓒ김혜율
어느덧 해가 지고 마당 진흙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자동차 바퀴 아래 구덩이에는 벌써 살얼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구덩이에서 쉽게 나올 수 있을까. 연 6회 무상지원되는 차량 출동서비스를 1회 써먹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남편은 내게 뭐라 뭐라 설명을 하면서 차 시동을 걸어 기아를 변속한 뒤 차바퀴를 움직였다. 그리곤 차를 지상으로 가볍게 끌어 올렸다.

더 이상 텃밭을 방치하지 않고, 독이 든 싹이나 온갖 식물 쭉정이 따위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는 사실 명확하다. 계속 치우고 정리하면 된다. 하지만 그걸 아는데도 안 된다면? 내 가정을 기분 좋은 장소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주변의 모든 것이 엉망이라면? 수납장을 추가하고, 물건을 버리고, 라벨을 붙이고, 정리 컨설턴트의 견해를 참고하고 그래서 매일 긴장하듯 살아도 어느 순간 똑같아지는 패턴이 반복된다면? 나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찍히다 못해 고양이도 발을 삘 만큼 커다란 함정이 생긴 마당을 보면서 깨달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 자체를 골똘하게 생각지 말 것. 때로는 그 문제의 문을 박차고 나와 다른 이에게 문제의 키를 넘겨주는 것도 좋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 집이 어지러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집이 아닌 데서 구해 보는 거다. 바로 나! 내 자신부터 돌아보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있잖은가. 집을 치우고 어찌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거다. 그중에서 우선하는 건 ‘몸’이다. 애를 키우는 엄마다 보니 마음은 돌보지 않을래야 돌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메리와 욜라와 로가 번갈아 가면서 문제를 일으켜 주고 내 이성을 마비시킬 때마다 도를 조금씩 닦으면 된다. (이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굳이 계룡산 바위동굴에 들어가거나 폭포 한가운데 엄지발가락 하나만으로 서 있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반의반쯤 도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몸을 다스리기 위해 할 일 목록을 뽑아 보았다.
1.매일 적절한 운동을 한다.
2.아이들 재우고 난 야밤에 통닭이나 떡볶이를 먹지 않는다. 대신 탄산수를 마신다.
3.욜라 친구의 생일파티에 갈 때 내가 입을 의상을 사러 옷가게에 간다. (꽃차 전문 가게 옆 새로 생긴 옷집에 꼭 가 볼 것)
4.오랜만에 미용실에도 가 보자. 미용실에 가서 어려 보이는 파마를 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내 몸을 돌보고 나서 집도 둘러보는 거다. 기분 좋을 만큼만 집을 치우고 나머지는 내버려 둔다. 어차피 봄이 오고 있고 봄맞이 대청소가 내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사 놓고 일 년이 넘도록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유리 창문 닦개도 곧 써 먹게 될 거다. 그나저나 마당은.... 질퍽한 마당은 어떻게 할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진흙 구덩이 속에 더 깊이 파묻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와 때를 기다리면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눈이 한차례 더 내려 마당이 늪처럼 변한다 해도 나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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