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세븐' - 13]

한중에서 유비와 격전을 벌이던 조조는 점차 초조해지고 있었다. 앞에는 강력한 마초가 있어서 도무지 진격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퇴각을 하자니 촉군이 자신을 조롱할까 걱정이 되었다. 남 주기는 아깝지만 버리기도 쉽지 않은 그런 땅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며 진중에서 저녁을 먹던 차에 젓가락에 닭갈비가 집혔다. 마침 암구호를 결정해 달라는 부하에게 그는 “계륵”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계륵의 고사다.

▲ '조조의 초상화', 왕치. (1607년경) 조조는 삼국시대에 가장 강력한 위나라를 통치한 영웅이었지만, 뿌리깊은 열등감으로 능력이 출중한 부하들을 시기했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암구호를 들은 양수는 데리고 있던 군사들을 불러 짐을 싸라고 명령했다. 하후돈은 놀라 어째서 군사들에게 짐을 싸라고 일렀는지 물었다. 양수는 ‘원래 계륵은 먹자니 맛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입니다. 지금 싸움이 곧 그와 같습니다.... 여기 있어도 별 이로울 것이 없으니 차라리 일찍 돌아가는 게 낫지요.’ 그 말은 들은 하후돈은 감탄하고 자신의 군사들도 짐을 꾸리게 했다.”("삼국지 연의", 이문열 평역.)

양수의 예견은 맞았지만 조조는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양수를 끌어내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 양수는 이전에도 지혜로운 판단으로 조조를 탄복 시킨 적이 많았는데, 조조는 한편으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면서도 동시에 양수를 경계했다. 그리고 적당한 꼬투리가 잡히자 그를 죽인 것이다. 양수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시기(phtbonos)는 질투(zelos)와 달리, 상대방이 잘되거나 혹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좌절감과 미움이다. 그 근본은 같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부러움이 지나쳐서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심을 경험하는 사람은 대개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우울감이다. 즉 상대의 재능을 인정하고 자신이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우울해지는 것이다. 둘째 야심이다. 어떻게든 상대방과 비슷하게 혹은 더 앞서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셋째 분노다. 상대방에 대해서 험담을 하고, 뒤에서 모략을 꾸며 해코지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흔히 다른 이의 실패를 보고 고소하고 통쾌한 기분을 느끼는데, 이를 독일어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한다. 잘 쓰지 않는 단어지만, 우리 말로 샤덴프로이데를 바로 ‘잘코사니’라고 하기도 한다.

조조에 대해서는 후대의 평가가 다소 엇갈리지만, 대개는 간사하고 야비한 악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환관의 자식이라는 열등감이 강했는데, 특히 글을 잘 쓰는 이들에 대해 시기심이 강했다. 조조 앞에서 실력을 뽐낸 부하들은 대개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무서운 전제 군주 시절에 윗 사람의 시기심을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조조는 종종 자신을 배신한 부하, 심지어는 목숨 걸고 싸우던 적국의 장수도 크게 쓰곤 했지만, 정작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인물은 가차없이 제거했다.

▲ '미스터 잘코사니', 로저 하그리브스. 시기(Invidia), 심한 시기심에 시달리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보고 기뻐한다. 종종 타인의 실패를 보고 고소해 하는 마음이 행복감의 유일한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물론 조조의 비정한 처세는 단지 시기심 때문이기 보다는, 난세를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는 어떨까? 독일어에는 나이트게젤샤프트(neidgesellschaft)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시기심으로 가득한 이기적 사회라는 말이다.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면에서, “사회적 시기심”이 사람들의 주된 행동 동기가 되는 사회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다.

사회학자 헬무트 쇠크는 자신의 책, “시기”(Neid)에서 시기 질투와 같은 미시적 사회 현상을 설명하며 사회는 이러한 시기심에서 해방된 공동체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사회가 실현 가능할까? 이미 대부분의 선진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한 굶주림과 추위,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풍요로 인한 퇴행성 질환은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욕망하고 추구한다. 타인이 가진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는 바로 이 시기심을 원동력으로 하여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라는 책의 저자이자, 진화 생물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프랑수아 를로르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농노가 왕이나 귀족을 시기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기심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야심의 원인은 시기심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시기심을 조장하는 사회다. 타인에 대한 시기심에 눈이 먼 우리들은 필요 없는 물건을 사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 그토록 늘 시기하며 미워하는 상대방과 똑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것이다.

▲ '소문의 여신의 깃털을 잡아 뜯는 시기의 여신', 프랑수아 기욤 메나주. 1806년 작. 파마는 명성과 평판을 널리 전달하는 그리스 여신이지만, 분노하면 루머와 거짓 소문을 퍼트리기도 한다. 빨리 소문을 전달하기 위해서 날개를 달고 있으며, 트럼펫을 가지고 다닌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소문의 여신은 원래 클리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명석하다는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명의 뮤즈 중 하나이며, 역사와 서사시의 신이었다. 그는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즉 기억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결혼의 신, 히멘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 리테라, 즉 문자의 여신이 태어나자 원래의 지위를 잃고 천상에서 쫓겨난다. 일설에 의하면 이름도 명석을 뜻하는 클리오에서, 지금의 소문(Pheme 혹은 로마어 Fama)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프랑수아 기욤 메나주의 그림을 보면, 시기의 여신 키르케(Circe)가 소문의 여신 파마의 깃털을 마구 뜯어내고 있다. 즉 좋은 평판과 명성이 시기심을 만나면, 헛소문과 루머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시기의 여신, 인비디아의 또 다른 이름은 네메시스, 즉 복수다.

우리는 자신의 시기심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시기심을 표현하는 순간, 자신은 열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게다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도 들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은밀하게 시기한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게다가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서는, 차라리 욕망하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진실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시기한다는 것은 결국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도 속인다.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그의 약점을 부각시키고 이를 널리 퍼트린다. 시기가 심한 사람들은 서로를 금새 알아보고 힘을 합쳐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동지를 만나면 죄책감이 줄어들고 그 힘은 두 배가 된다. 부러워하는 사람을 신나게 욕하고 힘을 합쳐 은밀하게 덫을 놓는다. 특히 시기하는 자들의 무기는 바로 험담이다. 험담처럼 즐거운 삶의 기쁨이 또 없다. “많이 가진 자가 악한 자다”라고 믿으며, 과장과 거짓을 섞어 상대를 중상한다. 이유 없는 모략을 당해 슬퍼하는 상대방을 보면서도 마치 정의의 심판관이라도 된 듯, “원래 많이 가졌던 자니, 이 정도는 당해야 공평하지”라면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시기심에서 비롯한 근거 없는 모략이지만, 그들은 정당한 복수, 즉 네메시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시기심에 눈이 먼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2) 키르케는 원래 마법사였다. 자신이 연모하던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가 찾아와 사랑하는 님프, 스킬라를 인어로 만들어 같이 살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심한 질투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인어가 되는 약이 아니라 괴물이 되는 약을 주었고, 스킬라는 머리가 여섯 달린 괴물이 되어 버렸다. (이미지 출처 = no.wikipedia.org)

샤덴프로이데, 즉 타인의 실패를 고소해 하는 마음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면서 허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면, 소중한 에너지를 써야 할 곳이 분명해진다. 삶은 단 한 번뿐이고, 언제 끝날 지도 알 수 없다.

둘째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비교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온통 다른 이에 대한 시기심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무관하게, 그리고 세상의 기준과 무관하게 자신의 독립적인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에 잠시 말문이 막힌 적이 있는지? 혹은 기뻐하는 상대를 보며 어떻게 표정을 관리해야 할지 곤란했던 적이 있는지? 타인의 성공에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공에도 기뻐하지 못한다. 타인의 실패를 바라는 마음은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져서,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해 버린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는) 심지어 자기 자신의 실패도 은근히 바라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솔직히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고통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타인의 성공에 진심으로 박수 쳐 주고, 타인의 실패에 진심으로 안타까워 할 수 있는 것이다.


 
박한선
경희대 의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대부속병원 전공의 및 서울대병원 정신과 임상강사로 일했다.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및 이화여대, 경희대 의대 외래교수를 지내면서,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 연구 중이다. 현재 호주국립대(ANU)에서 문화, 건강 및 의학 과정을 연수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2014)을 번역했고, "재난과 정신건강"(공저, 2015),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2016), "어머니 혹은 여자, 진화의학으로 살펴 본 여성의 건강"(2017)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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