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홍서정]

귀촌하고 다시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읽었다. 여전히 이상적이었고, 귀촌 입문서로 손색이 없었다. 손수 집을 짓고, 땅을 일구고, 소박한 밥상을 만드는 그녀의 삶을 동경했다. 나는 한동안 토마토를 손으로 으깨 마시고, 헌 옷을 뜯어 인형을 만들면서 퍽 조화로운 척 지냈다. 봄이 돌아오면 작은 텃밭에 야채까지 심게 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봄까지 딱히 바쁜 일이 없었기에 귀촌 생활을 꾸준하게 SNS에 공개했는데 지인들은 마냥 부러워했다. 모방의 반복, 정작 한 뼘도 내 것이 아니었는데 사진 안에서만은 그럴듯했다.

▲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최원형, 샘터사, 2017. (표지 제공 = 샘터사)
앎과 삶의 분리는 알기 전만 못했다. 생태적인 삶은 일상과 밀접한 문제였기에 실패의 무게는 자주 포기로 이어졌다. 입문서가 심히 이상적이라 눈만 높아졌던 탓일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은 커져만 갔다. 몸과 마음은 시골과 도시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던 차에 한 호흡을 멈추고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순전히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의 이중적 구성 덕분이다.

이 책에는 환경과 생태 위기에 관한 단단한 지식이 가득하다. 가깝게는 우리가 매 순간 만들어 내는 쓰레기 문제부터, 멀리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핵발전소 문제까지 생태계 위기를 총망라하여 전달한다. 다행히도 충격적 보고서 사이로 저자의 잔잔한 삶이 드러날 때마다 쉼표가 찍힌다. 덕분에 독려와 격려가 동시에 다가오지만 따뜻한 문체 덕분에 위안을 먼저 받는다. 문턱이 한결 낮아진 셈이다.

저자는 2010년 구제역 당시 돼지가 살처분 당하는 것이 학살이라 주장하고, 공장식 가축 환경에 한탄하며, 동물실험을 목숨과 맞바꾼 것이라 일갈한다.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지만 당장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당장 ‘무슨 무슨 주의’가 되기보다 당면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너와 나를 둘러싼 그물망을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 말한다.

“내가 행한 말과 생각과 행동이 어디에 머물러 어디로 가는지를 살피는 일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 오고 감에 대해 생각하고 선택한다면, 당장 내 몸에 닿는 열기가 싫어 에어컨부터 켜는 행위를 한 템포 늦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랙아웃을 우려해서 절전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블랙아웃을 막기 위해 전기를 절약해야 한다고 생각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아요. 블랙아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3쪽)

많은 이들이 친구에게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관계의 단절로 이어질까 불안해 하지만, 휴지 여러 칸을 뜯어 재끼며 민둥산을 연상하는 사람은 드물다. 저자는 타인과 나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인간-사물의 모든 인연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하나 개별적 독특성을 지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깊이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개별적 존재의 건강한 생존은 지속 가능한 공존과 다르지 않습니다.” (52쪽) 생태계의 연결망을 고민하다 보면 내 안의 욕망과 마주하게 되고, 멈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게 생태적 삶이란 아직도 입문 전이다. 고작 반려견에게 일회용 패드 대신 걸레를 깔아 주고, 양치할 때 무심코 틀어 두던 물을 컵에 받아서 쓰고, 집을 지으면서 큰 창을 달아 불을 덜 켜고, 여름에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고 버티며 지내는 정도다. 조금 나아지고 있다면 종이 한 장을 쓰면서도 마음과 행동에 간격이 생겼다는 점이다. 조악한 형편을 감추고서 다시 돌아설 수 없기에 자폭하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아직 글도, 삶도 남들 보는 눈이 두려워서 포장할 재간조차 없다.

그러면서 위로 받았다. 작은 부분이라도 앎이 삶으로 전환되는 순간, 다시 살아난다. 시작은 이렇게 사소해도 괜찮다면 다시 해 볼 만하겠다. 이미 생태적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식상한 만남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처럼 생태적 삶에 과감하게 입문했다 초라하게 주저앉은 친구에게는 소담한 선물이 될 수 있겠다. 회색 속지에 “다시 함께, 한 걸음이라도.”라는 덧붙임을 담는다면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홍서정
아이들이 좋아 다시 시작한 공부는 서른이 돼서야 끝났지만 꿈이라 여겼던 일을 타고난 체력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금방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작은 시골마을에 살아서 번동댁으로 불리며 또 다시 꿈을 그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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