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조세종]

한쪽에서는 수백억 원을 횡령하고 뇌물을 줬음에도 구속도 되지 않고 수조 원의 이득을 취하는 이가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가난과 빚에 쪼들리다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한 세 모녀가 공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016년도에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300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 1인당 3000만 원이 넘는 금액입니다. 이런 가계부채는 주택담보대출이 월등히 증가하면서 전체 가계부채의 40퍼센트가 넘습니다. 다른 기준으로 보면 비은행권 대출 규모가 50퍼센트를 약간 상회하고 있습니다. (산업은행 조사분석부, https://rd.kdb.co.kr/er/simpleJsp.do) 가계부채가 가파르게 상승해 부채상환능력이 약해지고 있고 특히 비은행권 채무자, 자영업자, 다중채무자의 경우 채무상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세 모녀의 경우 두 딸은 신용불량 상태였으며 연체상태에서 채무독촉의 시달림을 받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빚을 갚지 못해 장기 연체 중인 사람, 곧 채무취약계층이 350만 명이며, 금융기관 3곳 이상 돈을 빌린 사람들이 328만 명입니다. 부채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7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대부업체의 채권 규모가 2013년의 경우 7조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돈을 빌리는 일이 너무 쉽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용카드를 발행하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늘어나는 빚을 대학생들이 어떤 벌이가 있다고 갚아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빚을 사용한 결과만 놓고 채무자에 대해 그러게 왜 소비를 했냐고 하지 말고, 원천적으로 상환능력을 보고 차입을 하게 하며 더 원천적으로 금융과 채무에 대해, 그리고 금융자본주의의 수탈적 속성에 대해 알려 주는 책임이 금융기관, 교육기관, 그리고 정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이미지 출처 = flickr.com)

한편에서는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고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죄라는 의식까지 심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얼마나 잘못된 메커니즘에서 나온 거짓인지 알아야 합니다. 신용카드사와 은행이 가지고 있는 채권은 자산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부실채권이 발생하면 카드사나 은행의 재무건전성이 같이 부실해지기 때문에 자신들의 불량채권을 대부업체에 팔아 버립니다. 그런데 대부업체에 매각하는 금액의 비율이 2012년에 5.7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은행은 부실채권 비율을 낮추기 위해서 헐값으로라도 파는 것이 유리하고 대부업체는 100만 원짜리 채권을 5만 7000원에 사서 좋습니다. 그리고 대부업체는 5만 7000원으로 사서 100만 원에 연체이자에 이른바 법률비용까지 받아내려고 죽음에 이르도록 빚을 독촉합니다. 작년 10월에 채권추심과 관련해서 법이 일부 개정되었는데, 하루에 3번 이상 전화를 하지 못하도록 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루 2번의 전화나 접촉으로 제한해 놓았다고 채무자의 인권이 보호될 수 있을까요?

다행인 것은 성남시와 서울시를 중심으로 장기보유 악성부채에 대한 탕감운동이 진행 중입니다. 사회적 기업의 파산면책 지원으로부터 시작한 주빌리 은행 성과는 2015년 1년 동안 4000명의 빚을 탕감하였습니다. 1억 원을 모아 액면가 1400억 원의 부실채권을 사서 모두 다 태워버린 것입니다. 주빌리 은행은 실제로 은행은 아니고, 이렇게 부실채권을 매입하여 빚을 탕감하는 비영리 시민단체입니다. 아시다시피 주빌리가 희년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이 지나 처음의 질서에 어긋난 상태가 되어 버린 토지나 사람이나 화폐나 모두 다 원상태대로 회복시켜, 토지를 쉬게 하고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하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과 창조된 만물에게 기쁨이 됩니다.

현대는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자본주의의 극단을 달리는 시대지만, 수천 년 전부터 성경은 돈으로 돈을 벌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한 역대 교황님들, 중세 교부들, 더욱 거슬러 올라가 구약의 예언자들, 그리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시작과 마주 닿는 지점에 있는 ‘토빗기’에서도 그러한 당부의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의 토빗기 줄거리는 "토빗 이야기"에서 나온 대로 “하느님께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흘려듣지 않으시고, 고달픈 인생 여정에 늘 가까이 동행해 주신다, 그러므로 언젠가 실현될 귀향의 날을 희망하며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자선을 베풀며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21쪽)는 사랑과 정의 실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암브로시오 성인의 해석은 토빗기 전체가 의미하고 있는 정의의 실천보다는 경제적 정의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 "토빗 이야기", 암브로시우스, (최원오), 분도출판사, 2017. (표지 제공 = 분도출판사)
이는 암브로시오 성인 당시에 고리대금업으로 인한 착취가 얼마나 만연되고 있는지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인간의 죄악상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오늘날 “빚과 이자를 빨판 삼아 저개발국과 가난한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최첨단 금융자본가”와 “빚과 대출로 돈벌이하는 이들”(29쪽)은 모두 수많은 민중의 인간적인 삶을 파괴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위를 암브로시오 성인은 ‘칼없는 전쟁’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씌우며 빚은 죄라고 말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채무자들에게 가혹한 사회였습니다.

빚은 죄라고 일컬어지고, 채무자들도 범죄자들이라 불립니다. (91쪽)

그런 한편에서 당시 고리대금이 오늘날 못지않게 횡행했습니다. 고위 성직자든 평신도든 돈놀이와 고리대금업으로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다 보니, 325년에 열린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에서는 '돈놀이하는 성직자들에 관하여'라는 의안을 다루며 돈놀이 하는 성직자의 성직을 박탈하고 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뒤 443년 레오1세 교황의 공식문헌에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의 이자놀이 금령’이 있었고 이런 전통이 이어져 제3차 라테라노공의회(1179)에서는 고리대금업자는 성찬례에 참석할 수도, 교회 묘지에 묻힐 수도 없도록 했습니다. 요지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비롯하여 교부들은 재화의 독점이 하느님의 질서, 곧 자연의 공동소유권에 어긋난다고 보았으며,(38쪽) 이러한 줄기찬 전통은 오늘날의 사회교리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사유재산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너희가 불사하는 것을 공유하고 있으니 하물며 사멸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것쯤이야. (39쪽, 주석78, "디다케", 4,8)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도 인용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묵상하도록 권고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을 빚과 이자의 올가미에 옭아매는 것은 살인보다 더 흉악한 최악의 범죄(42쪽)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와 대 바실리오를 비롯한 교부들은 공통적으로 고리대금업을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악랄하게 이용하는” 돈놀이로, 고리대금업을 대죄로 단죄했습니다.

과연 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가난한 서민들에게 빚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효과적일 수 있을까요? 사회적 안전망이 극도로 취약한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 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커다란 문제로 다가옵니다. 과연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와 탐욕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어리석은 채무자가 뒤엉켜 살아가는 정글 같은 현실을 암브로시오 성인은 다 비판합니다. 그리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자기 우물에서 물을 마셔라”(잠언 5,15 참조)라고. 소비주의에서 해방하는 것, 가난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만이 길이고 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의 부를 누리다가 나중에 제 것마저 빼앗기기보다는, 처음부터 소비를 줄이고 가산을 아껴서 필요한 빚을 덜어 내는 편이 더 나았습니다.(101쪽)

아울러 아우구스티노는 폭리나 고리대금으로 얻어진 돈 뿐만이 아니라 그릇된 방식으로 획득한 돈도 자선기금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52쪽, 주114, 아우구스티노,"설교집", 113,2 참조)

자선이 불의를 합리화시킬 수 없다는 예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신의 모국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부터 서민들의 고혈이 들어 있는 14억 원의 기부금을 거절했습니다. 교황님은 작년 3월 2일 일반 알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저임금으로 착취하고, 노예로 만들어 번 돈으로 교회를 후원하려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 돈을 도로 가져가십시오.’ 하느님백성에게 그런 더러운 돈은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하느님의 자비로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 우리 삶의 방식이 빚에 대한 감수성, 신용카드 사용에 대한 성찰을 하지 못한다면 금융 사회의 덫에 쉽게 걸리고 말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자비의 희년이 지나갔지만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빚과 이자에 대한 성찰을 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 것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우리 삶의 방식이 빚에 대한 감수성, 신용카드 사용에 대한 성찰, 우리의 샘물을 길어 먹는 결단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금융 사회의 덫에 쉽게 걸리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가난한 서민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중산층에게까지 이르는 모든 시민사회의 문제입니다.

2014년 1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사회에 돈놀이꾼에게 빚을 갚느라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가정이 있는 현실은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비인간적(59쪽, 주136, 교황 프란치스코 일반 알현)이라고 이미 통탄한 바 있습니다. 고리대금과 빚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착취를 막기 위해서 연대의 경제를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대대로 살면서 그 사회 안에 경제도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경제 영역이 독자적으로 이윤을 추구할 수 없도록 협동조합이 발달되어 온 것이고, 현재 시민사회와 함께 이탈리아의 볼로냐, 스페인의 몬드라곤, 캐나다의 퀘벡이 가장 앞서가는 방식의 협동조합의 성과들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많은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이 이러한 협동의 경제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전교구는 올해 한끼백원나눔 운동본부를 통해 100시간 금융복지 교육을 시작합니다. 단지 파산과 면책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려 주는 일을 교육받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수탈자본의 본질과, 적어도 인간의 가치를 재산보다는 우위에 두는 이들을 위하는 교육, 그런 이들을 양산해서 자본의 바다 위를 선량한 시민들이 무사히 건너게 하도록 하는 교육을 시작할 것입니다.

100시간 교육을 하루 8시간 일주일에 한 번씩 해도 12.5일이 나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석 달을 꼬박 교육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암브로시오 성인이 척결하고자 했던 고리대금, 토빗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자신을 다 바쳐 성립시킨 경제적 정의에서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더 솔직하고 더 명료한 신앙인의 메시지가 들립니다. 성경 속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토빗 이야기의 진수를 우리에게 교부 문헌 총서로 들려 주신 최원오 님의 역주에 대부분의 이야기를 기대어 풀었습니다. 탁월하고 쉬운 언어로 삶과 신앙의 진수를 들려 주신 최원오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조세종(디오니시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대전교구 카리타스 한끼백원나눔운동본부 운영위원
소셜경영연구소 소장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지역에서 펼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활동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