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 - 박유미]

오늘부터 '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가 격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일상 안에서 신앙을 깨우치고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하는 전례력이 어떻게 각각의 시대적 지역적 배경 안에서 하느님과 자연, 이웃,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토착화 되어 왔는지, 신앙 선조들의 성찰을 되돌아 보면서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례를 이루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박유미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2월 2일 주님 봉헌축일이다. 첫 아들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유대법에 따라 예수 아기가 하느님께 바쳐진 날,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을 낳은 여인은 출산 뒤 40일이 지나 성전에 정결례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 유대법에 따라서(탈출 13,11-16; 레위 12,1-8; 이사 8,14-15; 42,6 참조) 성전에 정결례를 드리러 가셨던 날이기도 하다.

그 성전에서 아기 예수와 가족들은 오랫동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시메온과 예언자 한나를 만났다. 아기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시메온과 한나. 하지만 다른 한편 시메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 찬미가 지니고 있는 삶의 내용, 영광과 고통이 함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신 어머니 마리아!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죽기 전에 구원을 보리라던 하느님의 약속을 보며 드린 시메온의 찬미(Nunc dimittis)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믿고 그 말씀에 모두를 맡기고 죽음을 맞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아 성무일도 밤기도로 바친다.

▲ 11세기 그리스 수도원대성당 복자 루카 성당 천정 프레스코. (이미지 제공 = 박유미)

자연에 가깝게 살았던 선조들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이분이 세상에 오게 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과 삶을 기렸다. 대림절 동안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예수 아기를 태중에 모시고 있는 마리아를 기리며 촛불미사(Rorate 미사)를 드리고 예수 아기 탄생 이후 성전에 올라 정결례를 바치고 하느님께 첫 아기를 봉헌하기까지 그 어머니의 삶의 과정들을 묵상하며 경배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예수 아기 탄생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으로 마리아에 대한 경배가 그리스도의 삶과 연결되도록 강조되기 전까지 마리아의 정결례가 있던 때이기도 한 주님 봉헌 축일은 ‘마리아 빛의 축제’(Maria Lichtmesse)였다.

삶의 전통이 담긴 전례력에서 주님 봉헌 축일 오늘에 함께 하는 '마리아, 빛의 축제'와 그 의미가 내게는 새삼 깊이 다가온다. 이날까지 구유를 계속 모셔 두고 예수 아기의 탄생과 이와 관련된 어머니 마리아의 삶의 장면들을 묵상하며, 이날 성탄절 빛의 상징을 다시 기억한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분을 기억하는 촛불 행렬을 하고 일 년간 교회와 가정에서 쓸 초를 축성한다. 교회와 거리에, 그리고 각 가정에 일 년 동안 병과 자연재해 등 어둠을 막아 줄 빛을 모시는 것이다. 봉헌생활을 하는 분들의 봉헌(서품과 허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 주님 봉헌 축일과 마리아 빛의 축제 풍습에 하는 달하임 수도원에서의 빛 띄우기.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마리아 경배가 빛의 행렬, 빛의 축제로 연결된 것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다. 5세기 중반에 예수살렘에서 시작되었고 7세기 중반부터는 로마에도 도입되었다. 자연에 가깝게 지냈던 옛 분들에겐 원래 이날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지만 한 시간 이상 해가 길어지면서 땅에서도 나무에서도 새싹이 돋아날 봄기운이 시작되는 시기,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때엔 땅과 사람들의 풍요로운 생산을 관장하는 처녀신들의 축제를 지내고 있었다. 아직 추위가 머물고 있고 가을 추수 이후 겨울을 지나면서 양식들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고통의 시기지만, 그 안에서 이미 다가올 한 해가 잉태되어 있음을 느끼며 몸과 마음, 영혼에 정결례를 행하고 풍요를 기원하며 준비했던 것.

겨울 동안 집안에 머물러 일하던 농부들이 밭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때, 건물 안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촛불, 호롱불 없이 햇빛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는 때, 그리고 남녀 농노들, 견습공들은 그 한 해를 시작하기 전 잠시 고향을 찾았다가 돌아와 새로운 주인과 함께하기 시작하는 때. 이렇게 아직 어두움과 추위 속에서도 새로이 봄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때.

빛의 선물, 햇빛의 중요성을 이렇게 절실하게 느끼던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게 빛'이 되시는 분을 보았다는 시메온의 찬미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아주 구체적으로 깊이 느끼고 그릴 수 있었다.

빛이신 그리스도!

▲ 켈트족 전통에 따라서(Imbolic) 숲에 촛불 밝혀 두기. (이미지 제공 = 박유미)
그래서 이날 축성한 초로 한 해의 어둠을 밝히도록 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와서 가족들과 가축들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도록, 천둥과 번개, 자연재해로부터 구해 주시도록, 임종 때에 함께해 주시도록 그 빛을 향해 기도했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때에 이 촛불을 켜고 그 빛을 향해 마음을 모았다.

자연의 순환, 순리 안에서 삶의 지혜를 알았던 옛 분들의 가르침, 추위와 고통 속에서도 이미 빛이 커지고 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생명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며 기쁨과 경건함으로 풍요로움을 준비하던 땅과 어머니의 마음을 함께 담고 있는 마리아의 정결례, 그리고 이제 그 빛이 시메온과 한나에게 보여졌듯이 하느님께 봉헌되심으로써 우리 앞에 밝게 비춰지심을 기리는 주님 봉헌 축일.

그 빛으로 밝혀 살아가도록 내 집에 빛을 모시고 와서 내 삶의 시간, 나를 둘러싼 환경의 움직임 모두를 그 빛이 비추어 주시길 바라는 바람이 바로 자신의 봉헌으로 이어지는 오묘한 이치를 엿보게 된다.

오늘에 담긴 의미 그대로,
나의 시간들이, 동생과 모든 성직자들의 시간들이,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시간들이
당신 빛으로 비추어져
당신 원하시는 대로 나와 세상의 움직임을 느끼고 바라고 키우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박유미 프리랜서(수산나)
서강대 사회학과, 독일 본, Friedrich-Wilhelm-Uni. 종교사회학 전공, 가톨릭사회론 제1 부전공,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에 대한 시대별 반향으로 본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연구'. 학문과 일상생활, 교회 안의 신앙생활과 일상의 간격에 다리를 잇는 교육과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전례력과 성인들의 가르침에 담긴 사회적 배경 인식과 성찰을 통해서 사회교리의 보편성과 사회영성 일상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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