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욱 선생의 학교]

방학이 한창이다. 예전에는 여름방학이 약 30여 일, 겨울방학이 약 40여 일이 넘었지만 정부가 관광 산업을 발전시킨다며 학교에 사실상 강제적으로 5월, 10월에 연휴를 활용하여 중간 방학을 하도록 하면서 방학 일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수업 일수는 그대로 두면서 방학 일수만 조정하도록 한 덕분에 정작 여름, 겨울 방학은 줄어든 것이다. 조삼모사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대들 덕분에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퍽퍽해져만 가는데 학교 수업을 안 하면 부담 없이 놀러 가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라는 천박하고도 철없는 그대들에게 다시 한번 애도의 박수를. 덕분에 애들을 혼자 두고 일 나가야 하는 부담이 더 늘어난 것은 어쩔 건지....

‘방학’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만 그런 건지, 많이들 그런 건지, 개인적으로 물어본 적도 없고 통계 수치로 나온 걸 본 적도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의 방학을 연상해 보면 무언가 신나게 계획하고 놀면서 즐겁게 지냈던 기억보다는 지긋지긋한 방학 숙제에 시달렸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그땐 그다지 잘살지도 못하던 시절이었건만 우리 정부는 방학 때면 꼬박꼬박 ‘탐구생활’을 나눠 주고 TV와 라디오 방송까지 만들어서 보고 듣게 했었다. 게다가 독후감이며 만들기, 그리기, 거의 한 달치 일기를 하루 이틀 만에 써야 했던 (이 놀라운 상상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제법 볼 만할지도 모르겠다) 일기장, 심지어 우표 수집에 곤충 채집까지.... 개학 날이면 방학 과제물을 혼자 다 들고 학교에 가지 못해 부모님이 함께 등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새 학기를 준비하고 지나온 방학 시간에 대해 나누는 것은 온데간데없이 개학 첫날부터 처절한 숙제 검사가 이어졌다. 한눈에 봐도 아이가 만든 게 아닌데도 그걸 잘 만들었다며 전시를 하고 방학 과제물 우수아 상장까지 등급을 매기고 나눠 줬었다. 복도 한편에 근사한 전시장을 만들고는 방학 과제물 전시회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은 내가 교사가 되고 난 뒤에도 한동안 이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지긋지긋했다. 학생 시절 방학 과제에 한이 맺힌 탓에 난 신규교사 때부터 방학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왜.... 왜 우리 아이들은 방학에도 숙제에 시달려야만 할까?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 끝에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과감히 단 하나의 숙제만 내주었다.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오기’.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인쇄해서 나눠 주는 방학계획서에는 분명히 필수과제와 선택과제로 나눠서 빼곡히 방학 과제가 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담임이 그저 살아서 돌아오라고 하니 처음에는 아이들이 믿지를 않았다. 워낙 아이들에게 장난을 많이 친 탓에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장난하지 말고 방학 숙제 알려 달라고 하는 녀석들도 있었고, 우리 반은 필수과제 몇 개 안 하면 안 되냐고 나름 ‘딜’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모든 게 진심이니 그저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오기나 하라고 하자 그제야 우리 반은 진짜 방학을 맞은 기쁨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돌아오자 아이들의 환호성을 들은 대가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개학날부터 같은 학년 선생님들과 학년 부장님이 왜 아이들에게 방학 숙제를 내주지 않았냐고 나무라기 시작했다. 참 교육적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나 때문에 다른 반 아이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면서 혼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거라고 가르치려 들었다. 학부모들도 기본적인 것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은근히 항의를 했다. 하지만 아이들만큼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개학 날부터 초조하거나 힘들어 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학 숙제의 부담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온 동네방네 다 자랑을 하고 다닌 덕분에 난 단숨에 인기 교사가 되어 있었고 우리 반 아이들은 우리 학교는 물론이고 근처 학교까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부모와 동료 교사, 관리자들의 눈에 비친 나는 그저 방학 숙제만 내주지 않았을 뿐인데 방학 동안 아이들을 버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개학 날도 아이들을 지도하지 않고 동학년에도 협조하지 않는 교사가 되어 있었다. 학년부장님이 방학 과제물 우수아 시상도 있는데 어쩔 거냐고 따질 때는 내가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정말 난감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래도 스스로 과제를 해 온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왜 해 왔냐고 물어보니 그냥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심심했다거나 심지어 과제 중에 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해 왔다고 답했다. 신기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오늘날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방학 과제물 우수아 시상도 많이 사라졌고 방학 과제물 전시회도 거의 사라졌다. 예전처럼 무식하게 과제물이 나가지도 않고 필수과제와 선택과제로 구별하여 그나마 아이들이 과제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화도 생겼다. 경기도에 넘어오니 나처럼 방학 과제를 모두 자율적으로 실시하는 교사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우린 아직 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여전하다.

다시 물어보자. 왜 우리 아이들은 방학에도 과제를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공부도 잘하고 뛰어나다는 핀란드의 경우 방학은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과제가 전혀 없다. 초등, 중등 모든 학교 공부는 학교의 일과 시간 중에 진행될 뿐 학교에서 따로 과제가 제시되지는 않는다. 이 영향으로 2016년에는 서울에서 초등 1, 2학년을 대상으로 숙제 없는 학교를 발표하기도 했었다.(서울 ‘숙제 없는 학교’실험...공교육 바꿀 계기 될까, 연합뉴스, 2016. 08. 30.) 핀란드는 과제가 없어지면서 아이들이 방과 후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그들에게 학교는 그저 일부분일 뿐 삶의 전부가 아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배우고 활동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찾아 가며 삶을 통해 배워 가는 것이다.

▲ 방학과제 그림을 완성한 모습.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뚱꺼벨샘' 동영상 갈무리)

물론 우리나라는 핀란드와 많이 다르다. 어느 교육학자의 말처럼 핀란드가 아이들의 천국이라면 대한민국은 아이들의 지옥이다. 학교에서 과제가 없어져 봤자 그 자리는 분명 사교육이 채우려 들 것이고 그러한 환경은 그 누구보다 학부모가 나서서 조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과도하고도 불필요한 과제를 내주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이 사교육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학교에서 과제를 줄여 나가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공교육과 학부모들의 가장 큰 실수는 아이들을, 특히 어린 초등학생일수록 수동적이고 뭔가 퍼 먹여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시간만 나면 놀기나 하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몰려서 돌아다니면서 시간이나 버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아이들이 하는 것이라곤 어른이 간섭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그들의 시야는 좁기만 하다. 마치 침대에 사지가 묶여 있는 환자나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로봇과도 같아서 그들을 위해 우린 밥도 먹이고, 똥오줌도 받아야 하고, 전원을 켜고 무언가 끊임없이 입력을 해 주어야만 한다. 때문에 학교에서 이들을 위해 과제조차도 내주지 않는다면 그건 교사로서 방임일 뿐이지 절대로 교육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기 때문에 부모들과 교사들은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들볶아야 한다. 학원도 보내야 하고 돈이 최고라고 냉정한 세상의 법칙도 가르쳐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라고 강제해야 한다. 한마디로 아이들은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알아야 한다. 사실 아이들은 작은 새다. 생명력이 있고 언젠가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향해 힘차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새 말이다. 아직 작고 힘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할 것만 같은 것뿐이다. 우린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이고 부모이고 선생이라는 이유로 당장 날 수도 없는 타고난 날개 따위 필요 없다며 잘라버리고는 무선으로 조종이 가능한 프로펠러를 달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귀한 생명체인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고 임무를 잊지 않는 무시무시한 드론으로 길러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가라는 대로 모두 같은 곳을 향해 날아라! 그것이 성공이다!

학교는 분명히 배우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배움이 학교를 통해 일어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배움은 삶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경험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명백하다면 학교는 모든 것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생존과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가르쳐 주면서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변해 가야 한다. 또 아이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얼마나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주고 신께서 주신 능력이 무엇인지 알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그것을 더욱 개발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학교를 벗어나서도 학교에 매달리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학교라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해야만 한다. 이미 핀란드를 비롯해 아일랜드 등 다양한 국가에서 학교는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학기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과제를 내준다. 현행 교육과정의 내용이 터무니없이 많은 이유도 있고 협동학습이나 다른 수업 모형을 진행하기 위해 과제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발 방학만이라도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자. 과제 따위 없애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자. 절벽으로 걸어가다 떨어진 새들이 더 빨리 날아오르는 법이다. 제발 조급한 마음, 세상을 알고 있다는(이 거지같은 세상도 사실 그대들이 만들었다) 오만한 마음 따위 버려 버리고 그저 순수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자. 얼마나 예쁜가? 꽃은 그저 피어 있어 아름다운 것이지 별다른 무엇인가를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곁에 있음에 감사해 보자. 무엇을 생각하든 존중해 주고, 무엇을 계획하든 도와주고, 무엇을 실행하든 믿어 주자. 방학이니까 학원 특강 하나라도 더 듣도록 하기 전에 아이에게 무엇이 하고 싶은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봐 주자.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지켜보고 또 지켜 주자. 이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제 날개로 제가 갈 곳을 찾아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배움은 방학 과제로 일어나기보다 스스로 찾아 나설 때 비로소 불이 붙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최소한 어른들보다 낫다.

 
 
채성욱 교사(루도비코) 
2003년부터 인천과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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