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아침 첫 손님으로 대형 서점에 들어서니 입구에 늘어선 종업원들이 일제히 90도 인사를 한다. 엉겁결에 받은 표정 없는 인사. 낭패감인가, 공허함인가? 아님 쓸쓸함인가? 가끔 들리는 수많은 손님 중의 하나이므로 나를 기억할 리 없다. 온종일 서서 일하는 종업원의 처지에서 그리 반가울 리 없을 텐데, 민망하다. 유원지 입구에서 방문객에 허리를 숙이는 마네킹을 연상하게 되는데, 친절의 기계화인가?

세계 최대의 가전 박람회(CES, Consumer Electronic Show)가 정초 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되었다. 150여 국가에서 3800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하는 50년 역사의 CES는 16만 명이 넘는 관광객의 운집을 예상한다는데, 올해의 주제는 ‘접근성’이라고 한다. CES에서 내세운 접근성이란 무엇인가? 지난해 이세돌 9단을 물리친 ‘알파고’처럼 ‘빅데이터’를 동원하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비롯해 와이파이를 이용해 집안의 가전제품을 켜고 끄거나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최첨단 미래상’인 모양이다.

대부분의 뉴스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 심판이 빨아들이는 상황에도 우리 언론들은 CES 2017의 접근성을 적극 보도했다. 운전석에 앉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아도 목표 지점까지 알아서 주행하는 자동차는 돌발 상황을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그 기술이 더욱 진전돼 널리 보급된다면 탑승자의 안전과 편안함을 위해 사람의 운전을 제한하는 제도가 등장할지 모르겠다. 그를 위해 도로에 부가될 시설들은 수많은 자동차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들여다보고 통제하겠지. 교통사고는 물론, 뺑소니 사고도 사라지겠다.

지금도 스마트폰으로 가전제품들을 집 밖에서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다. 관련 광고는 늦잠 자는 남편을 깨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과 조명의 전원을 끄는 걸 넘어 전기레인지에 준비된 찌개를 끓이거나 세탁기를 돌릴 수 있다. CES 2017의 접근성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감성을 표현하는 로봇은 홀로 남은 애완견에 주인의 표정을 모니터로 전하며 먹이를 건넬 것이고 출장 중인 아빠의 목소리로 보채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줄지 모른다.

▲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조정할 수 있는 세상. (이미지 출처 = Pixabay)

지능형 냉장고는 계절에 맞는 식단만 권하지 않을 것이다. 주부의 눈높이에 장착된 모니터는 예정된 저녁 식단에 들어갈 음식 재료의 재고 현황을 알려 주며 거래하는 슈퍼마켓에 주문을 넣을 것이며 결제까지 맡을지 모른다. 이제 슈퍼마켓에 갈 일이 없어지겠다. 슈퍼마켓 종업원과 마주칠 일이 없으니 가격 흥정할 일도 없겠다. 도난사고는 물론이고 에누리를 요구하는 ‘진상 고객’도 사라질 테지.

정보통신 관련 기술의 눈부신 성과로 산업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새로운 시장이 융합, 창출될 것으로 예견하는 전문가들은 기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맘껏 구사하며 장밋빛 내일을 펼치지만 일찍이 소비자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스마트폰 보급으로 와이파이와 블루투스를 겨우 이해한 소비자는 차려 놓은 떡이나 먹어야 한다. 지능형 냉장고만 판매하는 세상이 된다면 어떤 풍경이 벌어질까? 냉장고가 요구하는 ‘접근성’에 응답할 수 없는 작은 가게들은 문을 닫고, 소외된 소비자들은 더욱 쓸쓸해지겠다.

그냥 냉장고 문을 열어 살펴보는 게 어떨까? 무엇을 어떻게 조리해 가족과 마주 앉을지 상상하는 게 더 즐겁지 아니한가? 가까운 시장이나 슈퍼마켓으로 나가 자주 만나는 상인과 잘 흥정하면 외상도 가능하다. 스마트폰을 어떤 단말기에 가져다 대면서 결제하는 모습이 세련돼 보이는가? 그런 광고는 세심하게 연출한 자본의 기호에 불과하다. 은행의 잔고가 모자란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차갑게 외면하는 ‘접근성’은 고객의 취향을 자동으로 분석해 분류하고 감시에 들어갈 것이다. 자본의 요구에 충성스럽게 접근하는 냉장고의 모니터는 추천 메뉴를 틈틈이 안내하겠지.

시간에 매듭이 없지만 달력이 새롭게 바뀌자 만나는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마운 일이지만 공연히 불편하다. 사람마다 하는 일이 다른 만큼 받고 싶은 복도 다양할 텐데, 천편일률이다. 정치인이 불특정다수에 보내는 연하장은 감동을 전하지 못한다. 이 시대에 부족한 접근성은 자본이 양산하는 최첨단 소외가 아니다. 따뜻한 이웃의 다정한 눈인사, 기억이 베푸는 반가움이다. 석유 위기와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시대에 자율 주행 자동차보다 자동차가 필요 없는 세상이 급한 건 아닐까?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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