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서 보낸 4년]

▲ 버스로 배로 먼길을 달려 소록도에 도착

버스를 그렇게 오랜 탄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같이 탄 친구들은 다들 잘만 잔다. 나도 그렇게 오래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버스 안에서 잠을 못자니 밖을 한참동안 보게 됐다. 5월이다 보니 꽤 더워졌는데 이런 젠장. 버스 창문이 고정돼서 안 열린다. 그런데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기엔 더운 사람이 아무래도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다들 자느라 더운 걸 잊은 것 같다.

이마에 짠 이슬이 맺힌다. 방법이 없을까? 없다. 내 옆자리에 윤아는 내 어깨에 기대서 잔다. 운동선수도 아닌데 어깨가 달궈져서 공을 던져야만 할 것 같다. 결국 나는 그 자세에서 멈춰야 했다. 진주를 지나서, 순천을 지나고, 벌교를 지나고, 마침내 녹동 항에 도착했다.

“네가 의사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든 한국에 있든 봉사활동을 하러 다니면 참 좋겠다. 그럼 나도 하던 일 접고 너 따라 다니면서 봉사활동하면서 평생을 보낼 텐데 .......”
“그럼 엄마나 동생은 누가 먹여 살려요?”
“다 같이 다니면 되지~ 그래도 돈이 아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지금 잘 벌어놔야지.”
“그냥 의사 안 될래요.”
“그건 뭐 아무나 되는 건 줄 아냐~”


내가 처음 ‘봉사활동’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건 아버지로부터였다. 글쎄 난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사람들을 돕는다. 그저 막연한 것이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중학교 방학 필수 과제로 봉사활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 1,2 때는 성당에서 봉사한 척 위장해서 학교에 갖다내서 봉사활동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중3이 돼서야 정말 봉사활동의 현장에 가게 되었다.

봉사라는 것, 참-

그때 나는 부산 수영구에 있는 한 수녀원에 봉사를 갔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시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빨래방에서 죽어라 빨래를 개고 옮기는 일만 했었다. 따지고 보면 봉사를 한 것이긴 했지만 내가 그렇게 뭘 잘했다는 느낌이 없었다. 뭔가 봉사에 대해 더 관심이 생겨 10시간을 넘어서 한 달 넘게 그곳을 주기적으로 다니며 일을 했다. 그러나 뭔가를 더 알아가는 것 말고 빨래만 기가 막히게 빨리 개서 옮기는 것만 늘었다.

두 번째는............. 말하기 민망하지만 TV에서 봤다. ‘법원은 ~~씨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6년에 사회봉사 200시간............’ 이거였다. 어찌됐건 간에 소록도는 분명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하루 종일 봉사활동을 하는 느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도대체 봉사는 뭘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사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냅다 들이박는 게 최선이었다.

▲ 녹동항에 도착한 우리들, 이제부터 봉사...

한센병, 그리고 소록도

소록도는 전남 녹동에 있는 작은 섬이다. 여기엔 한센병을 앓았거나 앓고 있는 어르신들이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몸이 성하셔서 정상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하신 분들은 마을에 사신다. 소록도 병원의 시작은 일제시대다. 이곳은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그냥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시켰다.

한센병은 한센병 균에 의해서 감염이 된다고 한다. 피부 말초신경계에 침투하여 조직을 변형시키는 병이다. 그래서 한센병을 조기에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몸의 끝에서 끝이 먼저 상한다. 이를테면 손가락, 발가락, 눈에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소록도에는 불구가 되신 분들이나 눈을 잃으시는 분이 많다. 지금 한센병은 거의 발병하지 않는다. 사실상 더 이상 발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소록도에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이곳은 관광지가 될 거란다.

시작부터 어렵다.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힘드냐. 배를 타고 짐을 들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한참을 가니까 드디어 봉사자 회관이 보인다. 봉사일정이나 소록도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쉬기로 했다. 나는 어쩌다보니 친구들과 정신병동을 선택하게 되었다(정신병동 말고는 노인 병동, 호스피스, 마을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왜 선택했냐면 음, 가장 봉사활동을 많이 해야 하는 곳이 정신병동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신병동에서

▲ 한센가족의 날 행사에서

그러나 막 걱정이 됐다. 내가 뭘 안다고 그런 곳에 가려는 건지, 가면 뭘 해야 할까 돕는다고 와서 폐만 끼치고 가는 건 아닌지. 넓은 단체봉사자 숙소에서 친구들과 떠들다 자려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빨리 자야했다. 새벽봉사가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소록도에 간 다음 날부터 3주간 어떻게 지내야 할지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는 건 그렇다고 치고 정신병동에 도착했을 때부터 일이 생겼다. 일단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깨워야 한다고 그랬다. 그래서 가볍게 할머니 몸을 흔들며 잠에서 깨워드린 후 식탁을 펴서 그 위에 입을 닦는 수건을 하나씩 놔드렸다. 그리고 곧 밥이 왔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에 따라서 메뉴가 달랐다.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반찬과 밥이 나왔다. 나는 어떤 할머니에게 죽을 먹여드려야 했다.

“싱거워요.”

내게 할머니가 건네신 첫 말이었다. 당황한 나는 식사를 가져오신 아주머니한테 “할머니가 죽이 싱겁다고 하시는데요.”라고 했더니 “그 할머니 혈압이 높으셔서 짜게 드시면 안 된다”며 그냥 먹여드리란다. 싱겁다고 하소연 하시는 할머니와 식당 아주머니 사이에 갇힌 나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렇게 긴 식사시간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할머니가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시듯 천천히 드시는데 싱거워서 안 드신다는 제스처로 딴 곳을 이곳저곳 쳐다보시는 바람에 식사는 더욱 늦어졌다. 결국 식사 아주머니가 그릇을 다 치우고 나서도 나와 할머니의 눈치게임은 계속 됐다. 뒤 늦게 안 사실인데 그 할머니는 사실 들을 줄 모르시는 할머니라고 한다.

내가 여기서 보낼 3주를 걱정하기 시작한 건 새벽봉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새벽 봉사를 마치고 잠시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밥을 먹고 정규 봉사시간이 시작됐을 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할 일이 뭔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정신병동에 원래 일이 그렇게 없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일이 있는데 나한테 숨기는 것인지, 내가 일을 못 찾고 있는 것인지 뭔지 도통 모르겠는 것이었다. 그런데 몸은 왜 이렇게 피곤해지는 것인지 급기야 빈 침상에 앉아 졸아버렸다.

저녁 식사 수발을 하고 정리하고 나오는데 3주간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내가 졸던 걸 장기봉사자의 대표가 봤는데 결국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나와 다른 친구 두 명은 사흘째 일을 마치고 정신 병동에서 노인 병동으로 옮겨가게 됐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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