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008년 2월 12일, 막바지 추위가 유난했습니다. 이런 날 종교인들이 다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경기도 김포 애기봉에서 시작했습니다. 애기봉은 한강 저 건너편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어서 유명한 곳입니다. 아마도 제게 마땅한 이미지라면 평화통일을 염원하러 이곳을 찾는 것일 겁니다. 그랬습니다. 네 편 내편 가르지 않고 남한과 북한을 하나로 이어주며 흐르는 강처럼, 남북한의 마음도 몸도 어서 그리 되게 해주십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골백번 애통하고 애절할 지경이었습니다만, 어제 거기 모인 종교인들은 저 도도한 강이 영원히 민족의 생명과 평화의 강으로 흐르게 해달라고 염원했습니다. ‘대운하’라는 신기루가, 경제만 살리면 뭐든 된다는 망령이 민족의 젖줄을 갈기갈기 유린할 참이기 때문입니다.

숭례문(崇禮門)이 불타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빌딩숲과 자동차홍수 속에서 애처롭게 고립된 섬이었습니다. 일제가 붙여준 이름이라 하나 ‘국보 1호’에게 바치는 예라고 하기엔 너무도 빈곤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한낱 정치인의 입신양명 욕심 때문에 너무도 헐하게 개방되었기에 위태위태했던 육신이었습니다. 그래도 600여년 장구한 역사, 온갖 환란과 전쟁과 풍파를 이기며 세세대대 희로애락을 묵묵히 지켜보고 보호해준 숭례문이었습니다. 선조들의 혼과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아름다운 목조건축이었습니다. 그 숭례문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시기에 우리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쟁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시절인가 봅니다. 일본제국주의보다 더 끔찍한 시절인가 봅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저 근대화 시절보다 지금이 더욱 고통스러운 시절인가 봅니다. 이 시절을 더 이상 견디고 버티기 힘들었나 봅니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시대의 징표

숭례문 방화범이 잡혔습니다. 결국 돈, 돈 때문이었습니다. 숭례문은 돈에 미친 나라, 돈이 절대가치요 우상이 되어 ‘예(禮)’를 받들기는커녕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이 나라의 희생제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경제만능주의, 개발지상주의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심성과 자제력마저 파괴했습니다. 그 괴물들이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가슴을 다 마비시켜버렸습니다. 석조축대만 남기고 거대한 숯덩이로 흉측하게 남겨진 숭례문을 보며 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문화도 역사도 근본도, 어떤 경우에든 남기고 간직하여 후대에게 넘겨주어야 할 철학과 신념도 돈 앞에선 그만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마는 우리 시대의 부끄럽고 아픈 자화상을 봅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사실상 숭례문 방화의 공범이요 방조자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국운이 불길하다’고, ‘불길한 징조’이니 매사 신중하게 하늘의 뜻과 민심을 살피며 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면, 장로이신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미신’이라 말할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렇게 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표를 알아들어라!” 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시대의 징표입니다. 자연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예의, 근본과 기본을 받들 줄 아는 예의, 철학과 정신적 가치를 받들 줄 아는 예의, 문화와 역사를 받들 줄 아는 예의,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높이 받들 줄 아는 예의가 세워질 때만이 국운이 진실로 융성해질 것이라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숭례문 참화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대운하 개발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

망국운하입니다. 대운하 추진 발상을 멈춰야 합니다. 거짓되고 허황된 논리들로 가득한 대운하 망상은 절대 거둬져야 합니다. 숭례문 나이보다 더 오래 오래전부터 생겨서 흘러온 민족의 탯줄이요 젖줄인 강들은 계속 흘러야 합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댐 속에 갇혀 흐르지 못하고 썩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와 역사, 정기와 정신은 보존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대운하가 강행된다면, 엄청난 환경재앙과 함께 새 정권에겐 치명적 자승자박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는 숭례문 전소가 가져온 충격과는 비교도 안 되게 참혹하고 혹독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도리어 경제파탄이 가중되고 말 것입니다. 숭례문 복원을 빨리하겠다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소름끼칩니다. 이 참화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민심을 거스르는 역주행(逆走行)입니다. 대운하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역천명(逆天命)입니다. 새 정권은 지금 역린(逆鱗)을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천하의 역적(逆賊)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부디 '시대의 징표‘를 알아듣기 바랍니다.


종교인들은 옷 속을 파고드는 찬바람을 거스르며 침묵 속에 강 길 따라 걸었습니다. 새만금갯벌 간척을 막지 못한 업보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어 자꾸만 목이 울컥거렸습니다. 용도변경은 절대 없다며 통일시대를 대비한 농지로 대부분 사용할 것이라 하여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낸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젠 아예 그 뻔했던 가면조차도 다 벗어던지고 ‘새만금 두바이’라는 새로운 신기루를 내걸었습니다. 기름 절은 태안 앞바다도 주민들 얼굴도 떠오르며 가슴이 저몄습니다. 어서 다시 가봐야 하는데...... 생각하니 미안함이 밀려듭니다. 거짓과 위선의 시대, 무책임과 탐욕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그처럼 바다도 죽이고 육지 강들마저도 죽이면서 얻는 발전이란 게 가능하기나 할 것인지, 또 그렇다한들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묻고 또 묻게 됩니다.

모든 존재에 대한 공경이 믿음의 길

우리 종교인들은 이해타산 할 것이 없습니다. 하늘의 뜻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모든 존재에 대한 공경만이 우리 행동의 잣대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 가야할 길은 오로지 믿음의 길, ‘혼 길’입니다. 생명의 길이고 순리를 따르는 길입니다. 종교의 유무가 신앙인임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오로지 삶과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도리어 저는 종교를 갖지 않은 수많은 이들 속에서 거룩한 신의 표상을 자주 보곤 합니다. 순례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낯선 숙소에서 첫날밤을 준비하는 순례단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하려 합니다. 마음은 늘 함께 걷고 기도합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순례자.’ 여러분도 저마다 있는 자리에서 또 다른 순례자가 되어주시길 정중하게 청해봅니다. 제가 있는 전주 평화동 성당 신자들도 순례단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순례 기간 내내 기도드릴 것입니다. 순례의 행렬이 더욱 길고 넓어질 때, 대운하 망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시대의 제물로 희생당한 숭례문 앞에 조금 더 떳떳하게 설 수 있으리라는 믿음입니다.

2008년 2월 13일 ‘생명의 강을 모시는 순례단’ 이틀 째 이른 아침

전주 평화동 성당 문규현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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