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광주전남 공익변호사모임 '동행' 이소아 변호사

“피해자들은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들의 말로 할 수 없는 말들을 말로 알아듣고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법적으로 의미없게 되어 버린 그들의 말이 법의 말 세계로 초대되어 법적으로 유효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광주전남 공익변호사 모임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이하 동행)에 문화학자 엄기호 씨가 전한 말이다.

동행은 광주,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여성과 아동, 장애인, 이주노동자, 난민,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위해 공익소송과 자문, 법률연대 활동을 하고자 2015년 5월 길을 나섰다.

법을 지팡이 삼아 함께 걷자고 나선 길벗 이소아 변호사(소화 데레사)는 동행을 시작하며 “법률 전문가로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 내야 하는 일은 존엄과 인권을 요구하는 이들의 작고 낮은 목소리를 유효한 언어로 전하는 것이며,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은 세상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 "동행으로 인해 행복하다"는 이소아 변호사. ⓒ정현진 기자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홀로 할 수 없고, 혼자 하지 않을 것”

약 1년 6개월간 동행은 많은 이들을 만났다. 폭행으로 죽은 성매매 여성 사건에서 증언을 해 준 그녀의 동료들, 1급 장애에도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이와 장애인단체 활동가들, 업무상 과실치사로 재판을 받은 세월호 민간 잠수사, 진도에서 세월호 가족들을 지원하다가 우울증과 트라우마로 자살한 경찰관의 유가족 등을 비롯해 현재는 15건 정도의 사건에 법률 지원과 연대를 하고 있다.

처음 동행을 시작할 때, 주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일이 있겠느냐 또는 수입이 생기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그러나 이소아 변호사는 “할 일은 너무나 많다”며, “변호사라는 직업이 좋은 이유는 조건과 상관없이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고, 연대 요청이 많아서 일 자체로 보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혼자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동행’이라는 이름처럼 이소아 변호사가 일하는 방식은 사건을 맡아 문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직접 당사자와 관계자들을 만나고, 특히 인권과 관련된 사건은 관련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면서 사건 자체의 해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본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도록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다.

자신의 일을 “운동”이라고 하는 이 변호사는 “소송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이슈에 대한 목소리를 엮어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며, “그러나 꼭 바뀌지 않아도 된다. 함께 말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하기 위해 공익전담 변호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변호사 일은 대부분 서면 작업이고 주로 서면과 싸운다. 하지만 서면의 내용들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공익전담 변호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수원을 졸업하고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뒀던 일은 엔지오단체 상근 변호사였다. 적극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대학 때 가톨릭학생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활동은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같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보면서, “저렇게도 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영감은 “활동가이면서 변호사로 살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됐다. 사법고시를 합격한 뒤, 휴식을 위해 찾았던 수도원 성당에서의 기도,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이 은총을 살겠다”는 약속도 지켜야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상근 변호사, 성매매피해여성 상담 센터인 ‘다시함께센터’ 등을 거치면서, 그는 공익전담 변호사를 잘 할 수 있겠다는 확신과 일의 ‘재미’를 발견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투병 생활은 그 재미를 제대로 얻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끌었다. 개인적 사정으로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면서 본격적으로 공익변호사 활동을 모색했다. 이미 민변에 있을 무렵 동료들이 공익변호사그룹 ‘희망을 만드는법’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고, 스스로 준비과정을 거쳤다. 공익변호사로서 전문성을 살리고 특화하는 게 어떠냐는 선배 변호사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광주에 내려온 뒤, 광주, 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법률 자문이나 연대가 필요하면 꼭 연락해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관계를 맺었다. 민변 활동을 통해 알게 됐던 인맥들도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는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변호사이자 활동가가 되어 갔다.

▲ 공익변호사모임 동행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 companion-lfpi.org)

“왜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로 일하려 하는가”라는 질문

이소아 변호사에게 사람들은 “왜 변호사가 아니라 활동가로 일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이 변호사 자신도 그 둘 사이의 경계를 넘기도 하고 때론 통합하기도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 질문을 다시 던지자, 그는 “변호사가 활동가이면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나는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활용할 수 있는 도구”라면서, “이를테면 법률 활동가로서 소장을 넘어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때론 기자회견도 조직하고, 법을 잘 모르는 활동가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면서, 당사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이 일에서 얻는 나의 재미”라고 말했다.

현재 이 변호사는 홀로 일하고 있다. 함께 일하면서 각 현장에 파견할 동료가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다. “돈은 어떻게든 생길 거예요”라고 웃는 그는 내년엔 어떻게든 동료 변호사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올해는 장애인과 광주지역 이주노동자 문제에 집중할 예정이라는 그는, 특히 지역 이주노동자 현황 조사조차 없는 실정이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10년 뒤, 동행은 어디쯤 향해 가고 있을까. “10년 뒤에 저는 여기 없을 거예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단체나 조직이 건강하게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운영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대표 등의 장기 독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그는, “10년 뒤면 50살 즈음인데, 그때까지 제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나요?”라며,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하고, 또 공익변호사를 원하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라고 답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다. 변호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재미”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 재미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만나고 엮어 가고,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 법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충분히 행복하다”며, “내년에는 더 재미있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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