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서상덕]

- 이스라엘 대 대한민국

1. 이스라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9-10)

AD(주님의 해, 기원) 33년. 인류 구원을 향한 막바지 길.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손에 손에 종려가지를 든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었다.

맞은쪽 동네에 매여 있다 제자들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예수님을 태우게 된 어린 나귀. 사람들의 환호에 우쭐해진 어린 나귀는 ‘어, 뭐지? 뭐지....’ 하다가 ‘나는 보통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왕이구나!”라는 착각에 빠져들고 만다. 온 도성을 술렁임에 빠지게 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주인에게 돌아간 나귀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예수님을 통해 성경에까지 등장한 나귀는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1) 권력에 타협한 사두가이 대 율법에 얽매인 바리사이

예수님 시대에도 어린 나귀 같은 존재들이 적지 않았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면서도 한없이 낮추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환대하기보다, 눈앞에서 그분을 대하면서도 ‘자신들이 만든 하느님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이 그들이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지배층이었던 사두가이파는 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에 속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는 산헤드린(이스라엘의 입법과 사법을 통괄하는 최고기관)의 의장이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사제는 대단한 위세를 지녔다. 백성들은 대사제를 살아 있는 율법의 화신으로 여겼다. 대사제의 뜻에 따라 민중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로마제국에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 본시오 빌라도 총독이 대사제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사제 임명은 유대의 정치 주권자에 의해 결정됐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번번이 음모와 협박, 뇌물 등의 부정과 불의가 개입됐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사두가이파에 속한 일부 사제들은 귀족으로서 정치에 개입하고 로마 식민지 이스라엘의 지배계층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전통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 했다. 로마라는 외세와 타협하며 불의에 둔감했기 때문이다. 뇌물을 주고 대사제가 되기도 하고 로마인들과 손잡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 산헤드린이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같은 편에 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하고든 타협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구전 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다. 히브리 성경에서 확인되지 않거나 불분명한 교리들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두가이들이 오롯이 중시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지닌 기득권을 세세대대로 보전하려 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한 이들은 이후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하느님나라에 보화를 쌓지 않고 지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린 이들의 끝이 어떤지 보여 주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 하늘을 보며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도를 하는 바리사이와 죄인의 기도.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예수님께서 ‘독사의 족속들’이라 부르며 힐난하신 ‘바리사이’도 어리석은 나귀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두가이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은 성문 율법 외에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율법도 존중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등을 믿었다.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에 대한 희망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두가이들에 비해 현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세속과 거리를 두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다.

알려진 대로 바리사이들은 구전 전승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열성이 대단했다. 이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도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시기에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 집단이 바로 바리사이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당대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리사이의 가르침을 대비시키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리사이들이 신앙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왜 그토록 주님의 질타를 받았는지 돌아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충실하기만 했다면 주님으로부터 그토록 따가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열성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율법의 참 정신을 잃고만 것이다. 또한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새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율법의 근본정신이 아니라 형식에 매몰돼 인간적 관습으로 사람들을 옭아맴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훼손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대립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2)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기껏 찾아간 아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신 성모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모질게 들리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굳이 성경에 밝혀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의 이 장면은 인간의 모습을 취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당신처럼 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진리다.

부모나 형제가 소중하지 않은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이 장면을 통해 세상에서 맺어진 인륜보다 하느님의 뜻, 천륜이 더 중요할 뿐 아니라 본질적인 것임을 직설적으로 보여 주신다. 이 장면은 성모 마리아가 참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까닭도 함께 확인시켜 준다. 낳아서 기른 자연적, 인륜적 사실보다 하느님의 뜻에 “예!” 하고 응답하고 따른 주님에 대한 절대적 순명에 있음을 성경은 보여 주고 있다.

성경에 이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도, 예수님께서 경계하실 정도로 하느님의 뜻보다 인륜을 앞세우는 세태가 팽배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왜 안 그랬을까.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로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 와중에도 지배계층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내세우며 외세와 결탁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허물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2. 대한민국. 이 땅의 사두가이, 바리사이

2000년이 지난 한반도. 예수님께서 염려하셨던 상황이 이 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안타까움을 넘어서 쓰라리게까지 생각되는 건, 실제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난 그리스도인조차 하느님의 뜻이 아닌 인륜을 우선함으로써 생기는 불행과 비극이 적지 않은 우리 현실 때문이다. ‘인간적’이라는 구실로 주님의 정의나 공동선보다 사적인 정을 우선하는 모습이 일상다반사다.

마치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테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넘쳐나는 듯하다. 이러한 세태로 인해 불의가 세상을 뒤덮는 현실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하느님 뜻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더 이상 불의는 불의가 아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적’이라는 가림으로 포장된 불의가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 2014년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회원 50여 명이 서울 예수회센터 입구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정현진 기자

1) ‘대수천’,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의 그림자
-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일까.

언제부터인가 시국 현장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낯선 장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고 나선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상임대표 서석구) 소속 회원들로 인해 생겨난 모습이다.

시국미사를 봉헌하는 코앞에서 큰소리로 항의집회를 여는가 하면, 미사 중 성당 진입을 시도해 이를 막는 이들과 소동을 빚기도 한다. 사제의 미사 강론이 귀에 거슬린다고 미사를 방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참 신앙이고 다른 이들은 모자라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스로 ‘대수천’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비난한 사제 3명, 친북반미 반정부 시국미사를 주도한 신부 73명, 정진석 추기경(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용퇴를 요구한 신부 25명 등 100명(중복자 제외)의 ‘정치사제’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치사제’들이 남남갈등을 부추겨 1년 갈등 비용이 82~246조 원에 달하며 540만 명의 천주교 신자 중 420만 명을 냉담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왔는지에 대한 합리적 설명은 없다.)

주교회의 의장을 지낸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에 대해서도 ‘반역 정치신부’라고 말한다. 제주 해군기지 반대를 주도해 국민혈세 수천 억이 더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이유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을 지낸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장) 등도 이들의 눈에 ‘붉은 사제’이고 북한에나 가야 할 사람 정도로 묘사된다.

이들이 시국 관련 행사가 열리는 자리에서 외치는 구호는 대개 “종북성직자는 북한으로 가라!” 정도로 요약된다.

대수천은 지난 2013년 8월에 결성된 가톨릭 평신도들의 모임이다. 이에 앞서 지난 2010년 주요 일간지 광고를 통해 등장한 ‘천주교 나라사랑기도회’를 잇는 조직이다. 김계춘 신부(부산교구 원로사제) 등이 지도사제를 맡고 있으며, 서울, 대구, 부산, 춘천, 제주 등지에 지부를 두고 1100여 명의 평신도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석구 대수천 상임대표는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고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친북, 반미, 반정부 정치사제를 포함한 모든 사제와 평신도의 영적 대각성은 물론, 회개를 통해 교회가 거듭 태어나도록 촉구하기 위해 모였다. 정치사제들은 이제라도 교회와 나라를 위태롭게 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제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주시기를 간곡히 기도드린다.”고 모임의 취지를 밝힌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는 행동에 대해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자신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대수천 회원들을 한 번이라도 접해 본 이라면 이들이 가톨릭 신자인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대수천 회원들은, 가톨릭교회가 전 세계 교회 차원에서 공유하고 가르치고 있는 ‘가톨릭 사회교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눈에는 사회교리 실천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조차 오도되고 왜곡된 정보에 빠져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분별없는 사제가 되고 만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대수천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책에 "올바른 사회교리"라는 이름을 붙여 보급에 나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마치 몇 권의 책, 이론서로 자신들이 교도권자라도 된 양 행세하며, 자신들과 뜻을 달리하는 이를 가르치려고 든다. 이러니 교회의 가르치는 권한을 지닌 교도권자들이 우습게 보이는 건 당연한 모습이 되고 만다.

▲ 2016년 대수천은 명동대성당 앞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 규탄 집회를 열었다. (이미지 출처 = catholicsuho.com)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교도권은 교회 안에서 주교직을 계승하는 주교들과 교황을 통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도권은 계시의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어 성령의 빛으로 밝혀 줌으로써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하고 오류로부터 진리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교도권을 낡은 유물이나 쓰레기쯤으로 취급하는 것은 결국 교도권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만 자신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교회 안팎의 전문가와 학자들은 이른바 ‘대수천 현상’을 그리스도교 정신에 대한 이해 부족 또는 부재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부’가 덜 됐다는 소리다. 실제 대부분의 신자들이 6개월에서 1년 남짓한 예비신자 기간 중 배운 교리나 성경 지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한국 교회의 실상이다. 길어도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배운 것을 가지고 평생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 셈이다.

대수천 회원들 가운데 소위 지식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박사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지식은 ‘거기서 거기’라고 할 만하다.

한 평신도 신학자는 “대수천 회원들의 경우 사회적 지위나 배경은 높지만 신앙적 면에 있어서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어린애 같은 발상과 행동을 보이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수도권 지역 한 본당 사목회장은 “세상이 주는 십자가는 멀리하고 천상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대수천 현상을 낳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일찍이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들이 보인 개인주의적 신앙이 오늘날 너무 팽배해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2) 그리스도인의 자격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한국 교회의 중산층화 문제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량’적인 면에서 한국교회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대세’와 ‘물량’이라는 세속에서 말하는 성공 기준이 어느새 교회 안에도 그대로 이식되어 활개를 치고 있는 모양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세상의 것’이 신앙까지 좌우하는 척도가 되고 말았다.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지위가 ‘봉사’가 아닌 개인의 ‘명예’가 된 지 오래다.

교회를 이렇게 만든 이면에 악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 악의 세력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은 그다지 치열한 듯 보이지 않는 게 우리 현실이다. 여전히 겉으로 드러나는 양적인 면에만 매몰되어 외견상 번지르르한 데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고 있는 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다.

예수님 시대 사두가이들처럼 오늘의 지배계층들은 어느 쪽이 더 영향력이 있고 판세가 유리하고 숫자가 많으냐에 따라 운신의 폭을 조절한다.

교회 안에서 지도층이라 불리는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세속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느님을 자기가 필요로 할 때, 무엇을 요구할 때 그 뜻을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 여긴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사울 왕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기득권과 왕권을 자기 것으로 알고 지키려 했기 때문에 결국 백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그는 자기 목적에 하느님을 이용하려 했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한 자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가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누리는 지위와 명예, 그 어떤 소유라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세가 없다면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지위와 명예뿐 아니라, 돈과 재물,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건강, 좋은 기회와 생명마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것뿐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그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서상덕(스테파노)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셨던 하느님을 믿는다. 세상 복음화에 대한 관심으로 고등학생 시절부터 가톨릭학생운동에 몸담았다. 현재는 <가톨릭신문>에서 취재팀장으로 활동하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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