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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헐벗은 자의 크리스마스[시사비평 - 한상봉]
한상봉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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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1  14: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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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석 시인을 생각하며

성탄절에 만나는 예수는 놀랍게도 ‘아기’였다. 헤로데와 같은 폭군을 만나면 살해당할 수 있고, 그래서 객지로 부모의 품에 안겨 떠나야 했던 무력한 이주민의 아들이었다. 복음서에선 아예 아빠도 친아빠가 아니라고, 미혼모처럼 하느님 자비 안에서야 보호받을 수 있는 가련한 존재다. 그나마 후견인이 되어 주었던 요셉마저 일찍 사망하고 과부의 손에서 자라난 예수, 정말 남같지 않은 가련한 이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참 독특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다.

시몬 베유는 아예 예수가 ‘아빠’(abba)라고 친밀하게 불렀던 그분을 ‘노예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그 하느님이 식민지 백성으로, 노동자의 집안에 강생하신 분이 ‘예수’라 했다. 바닥에 가슴을 대고 사는 ‘암하아레츠’(am ha'arez)가 곧 예수였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지방민’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땅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맨발의’ 또는 ‘떠돌이’를 뜻하는 말에서 나온 ‘히브리’ 백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예수는 가난한 중생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예수의 신원은 우리같은 흙수저들에겐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그분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다행이고 고맙다.

유신정권과 5공화국을 거치면서 두 차례나 투옥되었던 시인 겸 문학평론가 채광석은 감옥에서 지은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라는 시에서 예수처럼 “자리를 털고 방을 쓸고 자리를 펴면 찌그러진 부모 형제 처자식이 말구유에 달랑 누워 기다린다.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가련한 내 가족이, 나 자신이 예수이기도 하고, 성탄절에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징역살이 하면서 채광석은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헐벗은 자들’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잼을 만들어 빵에 발라 먹고, 사탕, 과자, 깨엿, 사과 등을 삥 둘러앉아 먹고는 돌아가며 노래나 부르고, 제각기 안쓰러운 사연을 되뇌이며 잠자리에 드는 이곳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마리아의 처녀 탄생, 부활, 사랑도 모두 먼 나라 얘깁니다. 다만 절실한 것은 고달픈 인생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뿐입니다. 누가 진정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는 이들에게 있어 과연 무엇인가? 크리스찬, 그리스도인 된 마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이 참담한 생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예수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을 폐위시키는 일의 화급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는 친구여야 합니다. 언제나 동지여야 합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 어려운 시대를 위로하며, 또다시 위로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랑을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 마리아, 요셉과 아기 예수.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어쩌면 신학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채광석이야말로 ‘강생’의 의미로 제대로 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느님은 일찌감치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사람이 되었다지 않은가. 사람이 된 그 하느님이 보잘 것 없는 행색으로 지상을 거닐면서 제자들에게도 “나는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굳이 그분이 우리들 친구가 되시겠다는데, 한사코 그분을 높은 자리에 앉혀놓고 흔드는 인간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높아져야 그분 대리자를 자처하는 성직자들이 높아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분처럼 ‘복음적으로’ 살기 힘드니까, 그분을 우리와 전혀 다른 하느님, 하느님 아들로 남겨 두려는 심산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채광석은 '사랑노래'에서 “사람 좋은 하느님께” 정말 예쁘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살뜰한 정감이 그분과 우리들 사이를 가까이하고, 살아 있는 하느님을 내 일상에서 느끼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운다 님이여 시푸르둥둥한 엉덩이에 퉁그스의
후손답게 누런 피부로 나는 태어나 가시가 되어
그대의 손가락에 염증을 피울까 그리움으로 곪을
우리네 아픔을 어찌할까 가슴가슴 부비며
나는 기도한다 님이여. 마침내
나는 무릎을 꿇고 덩치 큰 내 친구 예수의 아범
사람좋은 하느님께 우리네 작은 사랑의 부끄러움을
감사하는 것이다 님이여
작은 사랑의 고달픔을 님이여 우리는 함께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 하느님께
우리 태어나 아픔으로나마 하나되어 있음을
울어 고해바치는 거다. 님이여
(채광석, ‘사랑노래’ 부분)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스는 예수 아기가 외양간의 냄새와 함께 세상에 침입하셨다고 했다. 남루한 일상에 얼마나 구원같은 전갈인가? 그분이 세상의 모든 가련한 인생들에게 복음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의 잣대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분 현존 안에서 그분처럼 살고 죽고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탄절에 고봉밥처럼 흰 눈이 무덕무덕 내리지 않아도 좋다. 내 몸이 외양간 같아도 좋다. 거룩한 공간이 거룩한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공간을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광화문이든 초라한 내 집 문설주라도 내 영혼이 그분을 향해 촛불 하나 밝혀 두고 있다면, 그분은 급기야 오실 것이다. 마중 나가는 내 발길보다 더 먼저 우리 앞에 서 계실 것이다.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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