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친구를 성당에 다니도록 이끌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는지를 물어 오신 분이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음.... 어떤 묘수를 기대하기보다는, 성당으로 이끌고 싶은 그 사람의 친구, 그러니까 질문해 온 분이 친절을 베풀면 친구가 움직일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언제 움직일지 지금은 알 수 없겠습니다. 언젠가는 친절에 응답하는 모습으로, 아니면 우리가 세월을 겪으면 자연적으로 끌리듯이 신앙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답이 매우 궁색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지인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적어도 내 쪽에서 내가 지닌 신앙이 삶에 미친 긍정적인 면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마 나쁜 것을 너도 한번 당해 봐라 식으로 소개해 준다면, 그런 나는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없겠죠. 그럼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정 부분 강제성을 띠고 전파되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고 명하신 것을 실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례를 통해 원죄를 씻지 않으면 구원받기 힘들다는 믿음 때문에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줘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던 시절도 있습니다.

이유가 긍정적이든 명령에 의해서든 주변 사람들을 성당으로 이끌어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만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될 테고, 그 신앙의 빛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적극적으로 생을 엮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이웃을 초대하는 방법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은 내가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성찰하게 만들어 줍니다. 더불어, 이왕이면 내가 신앙으로 이끌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신학적 배경상,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구성원을 이끄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역사에 개입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구세주의 인간됨, 곧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기간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우리와 같이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 역시 세상의 일에 개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고통받는 세상에 구원의 빛을 함께 밝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 명동성당에서 함께 미사 드린 신자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한때,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했던 시기가 있습니다. 1987년 6월에 있었던 민주화 시민운동에서 명동성당이 그 증거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망을 떠올려야 할 시간에 희망을 보았습니다. 가톨릭이 보여 준 사회참여적인 신앙을 통해 사회를 변혁할 힘도 보았을 것입니다. 교회의 이런 모습은 이미 신자였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아직 입문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 결집된 힘과 신앙에 동참하고 싶은 매력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요즘은 아득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명동성당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라 매우 배타적인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도망칠 곳이 없는 이들이 찾아가 문을 두드렸던 비빌 언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추억만 씹을 뿐입니다. 신자 수를 늘려야 한다면서 교회는 살아있는 신앙을 실천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그저 교회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신자들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안도하면서도 겉으로는, 신자수를 늘려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으니 어째 모순된 태도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고 싶다면, 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친절함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듯이, 그 현장에 나가 고통받는 이들의 외침에 목소리를 보태야 합니다.

이처럼 이웃을 이 신앙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그럽고 친절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즐거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머를 뺄 수 없습니다. 즐거운 신앙은 아주 강력한 매력이 될 것입니다. 이건 수도생활 공동체에서도 통하는 덕목입니다. 유머가 없는 공동체 생활은 낙타 없이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수도회에서는 급감하고 있는 수도성소자 인원 때문에 걱정이 커져 갑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입회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열심히 젊은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관심사를 들어야 합니다만, 우리가 웃고 있지 않으면 관심을 기울일 자가 있을까요?

적잖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구체적으로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는 이유로 마음의 평화를 들고 있습니다. 언뜻, 가톨릭교회는 그런 평화의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성당은 조용하고, 돈 내라고 귀찮게 하는 경우는 드물며,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평화라기보다는 고요와 침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영향에서도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요한 14,27) 해 줄 것입니다. 환경이 조용해서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쉽지 않은 삶을 회피하지 않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희망을 움켜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태도가 이 신앙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 그리스도 신앙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보고 신앙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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