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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문 밖에 자비를 전하자”희년 기간 ‘자비의 선교사’로 활동한 서경룡 신부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함께 지내는 자비의 희년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은 1000명이 넘는 ‘자비의 선교사’을 임명해 파견한 바 있다. 이들의 역할에 대해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는 “자비의 선교사는 각국의 개별 교구장 주교의 초대를 받아 선교를 촉진하고 희년과 관련된 행사에 힘을 불어 넣어 줄 것”이며 “특히 고해성사 거행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는 모두 29명이 임명됐다.

이중 가장 먼저 임명 소식이 나온 사람은 서경룡 신부(서울대교구 성내동 본당 주임)였다. 재의 수요일이었던 2월 10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파견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희년 기간 자비의 선교사로 활동한 서 신부를 성내동 성당 사제관에서 만났다. 지난 11월 18일, 자비의 희년 폐막을 이틀 앞둔 때로, 서 신부가 자비의 선교사 역할을 받은 기간도 끝나 가고 있었다.

그는 임명 뒤 천주교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자비의 선교사 역할을 시작하기도 전에 말하는 것이 “부끄럽고 죄송해서”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비의 희년이 끝나 가고 있으니 “시작 전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서 신부는 1986년 사제품을 받았다. 군종신부를 거쳐 로마 유학을 떠나 기초신학을 연구하고 1998년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가톨릭대학교 교수, 동대문, 연희동 본당 사목을 맡은 바 있다.

   
▲ 서경룡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강한 기자


- 자비의 희년 ‘자비의 선교사’로 지내며 어떤 활동과 경험을 했나?

서 - 자비의 선교사의 역할은 크게 2가지였다.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신자들에게 설명해 주고 영적 가르침을 주라는 것, 또한 자비의 선교사는 사죄권이 교황에게 유보된 죄도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해 주며 신자들에게 자비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2월 10일 바티칸에서 열린 파견식을 마치고 돌아온 뒤, 서울대교구 사목국 협조를 받아 지구 대여섯 곳을 순회하며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강연을 했다.

자비의 선교사 파견 미사가 봉헌될 때,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오상의 성 비오 신부’와 ‘성 레오폴도 만디츠 신부’의 시신이 안치돼 교우들이 보고 참배할 수 있었다. 레오폴도 성인은 비오 성인과 마찬가지로 고해성사를 잘 주신 분이다.

2차 대전 전에 돌아가신 레오폴도 성인은 앞으로 자신이 속한 관구 수도원이 파괴될 것이지만, 그가 고해성사를 집전했던 경당 고해소는 하느님이 남겨 두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고해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그 장소를 특별히 하느님이 남겨 주시기를 바란 것이다. 몇 년 뒤 2차 대전 중 독일의 폭격으로 고해소가 있는 경당만 남고 모든 것이 부서졌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줬을 때 강연을 듣는 교우들의 눈이 달라졌다. 자비의 희년을 통해 교우들이 고해성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매우 중요한 것임을 조금 더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고해성사는 한국 천주교 지도자들도 무척 걱정하고 강조하는 것이고, 한편 신자들이 힘들어하는 일이기도 하다. 형식적인 고해성사가 되기 쉽다는 점 때문에, 다들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고해성사에서 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서 - 자비의 선교사 파견식 기간 첫째 날, 교황님이 자비의 선교사들을 교황청 레지나홀에 모아 40분 정도 훈화를 하셨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한편으로 사제에게 하는 질책이었다.

교황님은 ‘사제들이 먼저 자비롭게 고해성사를 주는 사람이 되라. 고해성사 때 자비롭고 너그러워야 하고, 어려운 마음으로 오는 신자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인내를 갖고 대하라’는 당부 말씀을 하셨다. ‘고해성사가 참 중요하다.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제대로 못 준다면 안 되고, 자격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교황 자신도 예고 없이 교우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받은 적이 있다. 교황은 고해성사를 다시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전통적 관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같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 용서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관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부끄러움’이 있다. 교황님도 자비의 선교사들에게 부끄러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비정상이다. 아담과 이브도 죄를 지은 뒤 ‘너희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뉘우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비정상으로 보지 말자.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에서는 벌써 10년 전부터 고해성사만 아니면 천주교 신앙생활을 잘 하겠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건 어불성설이다. 이는 환자가 의사의 검진만 없으면 살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회개가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통회하고 돌아왔을 때 받는 것이 아닌가. 고해성사를 받지 않는 만큼 냉담도 늘어난다. 고해성사는 가톨릭 신앙의 최후 보루이고 중심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죄도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이다.

신앙고백에 나오는 “죄의 용서”를 교우들이 진심으로 느끼고 있다면 고해성사를 잘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삭막한 이 시대에 밖으로 나가 좀 더 능동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자비를 전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 고해소 앞에서 신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왕기리 기자


- 한국 천주교가 지낸 자비의 희년에 대해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서 - 나 자신부터 부족한 점이 많기에 어려운 질문이다. 자비의 희년은 기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것이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희년이 자비를 실천하고 알리는 시발점이 되면 좋겠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어느 정도 자비의 희년의 의미를 아는 것 같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우리 국민들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다. 다시 말해, (교회가) 사회에 얼마 만큼 영향력 있게 자비를 전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미흡하지 않았나.

지금은 자비가 없는 시대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사회에 자비를 전하는 운동이 있으면 좋겠다.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선도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이번 자비의 희년의 표어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를 살릴 수 있고, 평신도에게는 자발성, 지혜와 역량을 모아 본 경험이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하는 예수님 말씀이 있지만, 때로는 자비의 행위를 다른 사람이 알게 해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갑을 관계’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대기업만 욕하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우리가 조그만 갑의 입장이 되면 ‘갑질’을 한다. 내가 회사에 있으면 우리에게 납품하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고, 식당 종업원에게 큰소리친다. 신자들과 단체로 식당에 가면 늘 친절하게 대하고, 닦달하지 말고,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만 하라고 말한다.


- 자비의 희년과 관련해 많은 사람이 가톨릭교회의 ‘낙태’ 사죄에 관심을 가졌다. 낙태를 포함한 생명 문제와 자비를 주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 - 교황은 자비의 선교사에게 4가지 사죄권을 주셨는데, 낙태죄에 대해서만은 더 너그럽게, 자비의 희년 동안 모든 사제에게 사죄권을 주셨다. 그만큼 교황은 하느님이 자비롭게 낙태죄를 용서하심을 전하는데, 이를 특정 몇 명이 아닌 모든 사제가 하기를 바란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희년 동안 우리 교우들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낙태죄의 용서를 받으라는 교황의 당부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생명 경시 문제는 ‘자살’이다. 배아복제, 안락사 문제도 있지만, 더 시급하고 충격적인 현안은 자살이다. 자랑스럽지 못하게 OECD 국가 중 1, 2위를 다투고 있고, 노인, 청소년의 자살도 많다.

자살은 근본적으로 나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지만, 이는 다른 사람의 생명 경시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웃만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남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나를 사랑할 때 시작한다. 이기적 자기애와 구분되는 참된 자기애가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한다.

자살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따돌림이나 사업 실패 등 절망감에서 오는 자살이 있고,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살도 있다. 2014년 성남 환풍구 붕괴사고 때 행사 안전 담당자가 자살한 일이 있다. 죄책감이 없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훌륭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것이다.

   
▲ 교황청이 발표한 자비의 희년 로고.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를 표어로, 인류를 어깨에 짊어진 착한 목자 예수의 사랑을 형상화했다. (이미지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결국 자기와의 화해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때 가능하다. 스승이요 구세주인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판 유다는 죄책감으로 자살했다. 예수성심회의 요세파 수녀에게 나타난 예수님 성심의 메시지에는 유다에게 “너는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는 말씀이 나온다. 결국 유다는 자기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고, 이런 일은 하느님의 큰 자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 온다.

자살 문제는 정부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천주교가 하느님의 자비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타인에 대한 자비, 자기와의 화해를 우리 사회에 강력하게 전해야 자살이 줄어들 것이다. 자살이 많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자비심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매우 나쁘고,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이다. 자비 없이는 진정한 경제발전도 못할 것이다. 정신적 인프라가 깔리지 않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 자살에 대해서는 정신적 문제도 있지만,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족하고 서민들이 실직하거나 사업이 망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상황과 관계 깊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서 - 기댈 수 있는 최후 보루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서바이벌 게임, 정글의 법칙 하에서 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은 자비가 없는 것이다. 실패하면 일어설 기회가 없고, 고리대금업자가 판치고 있다.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다. ‘네가 망하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실패해도, 과오를 저질러도 다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한번 낙인 찍히면 끝이다.

교황님의 자비의 희년 칙서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우리 사회는 첫째 아들처럼 요구한다. 겉으로는 ‘정의’를 요구하지만, 우리가 대개 말하는 정의는 이기적인 정의다. 정의를 요구하며 잘못한 자를 벌하라면서, 어찌 보면 자기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첫째 아들에게 법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없었지만 그에게는 자비심이 없었다.

하느님은 둘째 아들에게 자비로써 정의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자꾸 첫째 아들처럼 잘못하면 벌을 주고 다시는 기회를 주지 말라고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법 같은 것을 요구하는 사회다.


- 끝으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서 - 강의에서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레미제라블”에 대해 말했다. (주교관에서 물건을 훔치고 경찰에 잡혀 온) 장 발장과 주교의 대화가 내가 드릴 말씀이며,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왜 나에게 잘해 주는지 물으며 의심과 당혹의 눈빛을 보내는 장 발장에게 주교는 “형제여, 내가 당신의 영혼을 샀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선물로 드립니다” 하고 말한다. 그 뒤 장 발장은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 사회에 대한 증오를 풀고 봉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 소설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복음적 메시지를 준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은촛대로 사든 위로해 주는 말로 사든, 미움으로 가득 찬 마음에 자비를 불어넣어 하느님께 선물로 바치는 역할을 신자들이 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나 자신도 그래야 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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