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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백만 촛불, 영적 혁명의 순간[시사비평 - 한상봉]

얼마 전 인터넷 전용선 와이파이 설치를 한 통신업체에 의뢰하였다. 토요일 오후 6시경 설치 기사가 집에 방문한다는 문자가 왔다. 난감했다. 이날 오전에 일 마치고 오후엔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가려고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약간 망설이다가 해당 설치기사에게 전화해 보았다. “저, 오전에 와 주실 수 없나요? 제가 오후엔 광화문에 가 봐야 해서요.” 순간 상대방 휴대폰을 통해 기사의 따뜻한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이 집 일 끝나면 바로 갈게요.” 그리고 삼십 분만에 달려온 설치 기사는 와이파이를 설치해 주곤 잘 다녀오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낯선 누군가에게 주저 없이 ‘광화문 촛불집회’를 들먹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받을 수 있다는 어떤 확신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모두가 박근혜 덕분이다. 영호남 지역의 차이가 사라지고, 신분과 계층의 장벽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에 공감하기 때문이고, 유치하고 추잡하고 노골적인 탐욕을 드러내는 인간들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인간과 짐승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이제 95퍼센트 서민을 짐승 취급했던 5퍼센트의 아귀들이 궁지에 몰려 있다. 날마다 청와대와 재벌, 언론의 주변을 떠돌던 아귀들이 부위별로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입에 문 음식을 버리지 못해 한결같이 말이 없다.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거부하고, 최순실은 내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장시호는 단어도 조합하지 못하고 떠듬거릴 뿐이다. 그 하수인들은 에덴의 아담처럼 책임을 떠넘기고, 지금 무너지고 있다.

이 아귀들에게 줄곧 권력을 넘겨주었던 사람들이 “속았다”고 말한다. 평생 공화당과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울타리 삼았던 이들이 멍에를 깨고 있다. 그들은 습관처럼 투표하고,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다. 애국심으로 사실상 친일파 세력을 옹호해 온 과거를 뉘우치지 못했다.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자고 했고, 국민행복시대를 열어 가겠다고 한 약속이 5퍼센트의 상류층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제 와서 대한민국이 ‘최순실의 나라’였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정부의 모든 약속과 대통령의 모든 발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게 아닐 수 있어”라고 말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충성심만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의 태도라고 믿었던 자들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은 혁명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왔을 때, 모세 율법에 따라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사람들이 윽박지를 때, 예수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예수보다 그들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예수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고 계시는 순간은 ‘회심’의 공간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복음서에는, 그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전한다. 구제받은 여인만큼이나 실천적인 구원을 경험한 이는 그 자리에서 돌멩이를 손에 쥐고 서 있던 사람들이다. 복음서는 다른 말이 없지만, 그들 손에서 돌멩이가 땅바닥으로 슬며시 떨어져 내릴 때, 그들의 눈에서 비늘이 한 겹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율법보다 귀한 게 사랑이고, 모두가 죄많은 세상의 공범자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 백만 촛불 앞에서, 그 아귀들에게 식탁을 내어 준 우리 자신도 반성을 거듭해야 한다. ⓒ왕기리 기자

백만 촛불 앞에서, 아귀로 전락한 권력과 부역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아귀들에게 식탁을 내어 준 우리 자신도 반성을 거듭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와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목 현장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 사목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전히 교회 안에서 빈민사목, 이주사목, 노동사목 등 차별과 배제에 노출된 이들을 위한 활동은 ‘특수사목’으로 취급된다. 가난한 이들의 사목의 주변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한편 이른바 ‘가난한 사람’이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한국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고 다만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교회조차 가난해질 의향이 없는데,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탓할 수 없다. 아직 배고픈 아귀들이 이미 배부른 아귀들을 탓하는 상황이라면, 참으로 우리 사회와 교회는 불행하다.

그래서 광화문 촛불은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 된다. 이참에 촛불로 청와대를 밝혀 아귀들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한다. 한편 이 촛불은 우리 내면에도 빛을 밝혀야 한다. 적자생존 피로사회에서 ‘먹고 살다 보니’ 자신의 양심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고백해도 좋다. 광화문 백만 촛불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자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종교적 시간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우리가 우리 삶의 참된 주인임을 확인하는 곳이며, 감추어진 나의 선함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복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름답게 들린다. 내가 다행하게도 90퍼센트에 속한 무력한 시민이라서 ‘여기서 촛불을 들고 있지’ 하는 깨달음이다. 삶이 강요한 고단한 외로움이 광장에서 형제적 연대와 만나는 경험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사회 전체 시스템을 개편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한편 교회가 예수처럼 “예언자의 반열에 있는지” 묻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 모두 영적 혁명을 요구받고 있다. 도러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와중에 성인을 찾고 있다.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야 한다. 이로써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악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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