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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장과 하느님의 나라[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황경훈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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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3  10: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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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나 종교학에서는 ‘구원’과 관련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있고, 특히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구원론’으로 체계화하기도 한다. 신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전제로 하고 전개되어 온 이 이론은 동양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불선과는 그리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늘 일부만인 경우가 많으므로 종종 편견으로 빠져 버리는데, 구원에 관한 생각이 그러한 것 같다. 근래 시한부 종말론이 무슨 홍역처럼 대단치도 않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이른바 이 ‘휴거’를 철저히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 고맙게도 거꾸로 ‘그런 구원은 없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 주어 구원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사실 구원은 개인의 체험에 따라 그 기준이나 범주가 다르기에 유불선이라고 해서 구원과 관련이 없다는 말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체험의 중요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종교체험도 인식의 대상이며 따라서 인식과 해석이야말로 종교성을 말하는 데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는 이유도 한몫을 한다. 또 그리스도교적인 구원 개념이 없다고 해서 승려를 포함한 대다수 불교인들이 불교에 구원에 관한 관념이나 교리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도 그렇다. 오히려 토착화나 종교간 대화 신학에서 열반을 하느님나라에 줄곧 비교해 온 한국적 토양을 놓고 볼 때도, 불교가 구원의 개념을 확대해 온 데에 공헌을 했으면 했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싶다. 어쩌면 깨달음을 얻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불교도를 비롯해 학문하는 사람들, 문인과 예술인,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이란 일상 속 작은 깨달음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구원을 이렇게 기존 종교의 틀에서 살짝 해방시켜 모든 이들의 삶으로 확대하면, 일상이면서도 그것이 초월되는 순간이나 지상적인 것에서 어떤 영원한 것을 감지하는 긴장과, 그것에서 오는 희열을 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에 접해 있으면서도 일상을 낯설게 하는 ‘광장’과 거기에 모인 군중의 함성이야말로 구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 우리를 다시 광장으로 불러낸 것은 직접적으로는 박근혜 씨의 어처구니없는 실정-이렇게 단순한 용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첩첩산중이요 갈수록 점입가경임은 이제 말하기에도 지치는 느낌이다-이었지만, 가깝게는 1980년 5월 전남도청과 1987년 6월 서울시청에 모인 시민들의 함성이 아니었을까.

그런 자리에 함께 서 본 이들은 귀로만 들어 온 것을 몸으로 확인하는 귀한 기회를 받는다. 그리하여 5.18광주민중항쟁 그 시간과 그것의 물리적 공간으로서 당시 전남도청이 왜 ‘해방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거기서는 대개 작은 범죄 행위조차 없었으며, 오히려 참가자들은 도덕의식이 높이 고양되어 평소보다도 더 질서를 잘 지켰다. 한마디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풍경이 바로 이러하다면 특정한 순간으로 국한되기는 하지만 광장이야말로 구원이 실현되는 현장으로서 일상이 종교가 되는 거룩한 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니 성스러움이나 거룩함이 일상성을 회복하는, 우리가 잊고 있던 종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자랑하는 ‘불경 한 구절만 손에 들면 바로 그곳이 절간’이라는 "금강경"의 핵심적 가르침이 무색해지면서 반역이 성공하는 대목이 아닌가.

   
▲ 일상에 접해 있으면서도 일상을 낯설게 하는 ‘광장’과 거기에 모인 군중의 함성이야말로 구원이 아닌가. ⓒ황경훈

사실 일상의 구원 운운하면서 학자나 지식인을 포함시키기에는 조금 더 염치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지난주 금요일에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 맨 얼굴 그대로 나온 우체국 택배 비정규직 공무원은 “한 번만 택배를 잘못 배달해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변상까지 하겠다고 하는데, 이번 일이 이런 상황에 이르도록 책임지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일갈하는 대목에서 대학 교수를 비롯해 뜨끔해야 할 지식인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겁 많고 책임감 없는 데서는 스스로를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광장에서 만나는 이들이 내 자식이요 형제처럼 느껴져 참으로 알뜰하게 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종내에는 이들과 더불어 행동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고서 ‘이번 사태의 근본적 책임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하는 고고한 지식인이야말로 구원에서 저만큼 멀리 서 있는 것은 아닌가. 광장에 서 보지 않고는, 목이 터져라 함께 소리치고 함께 돌을 던져 보지 않고는, 또 이를 위해 활동하는 조직에 몸담아 애면글면해 보지 않고는, 잠 깬 뒤의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 ‘은총의 때’는 늘 신기루로 남아 있지 않을까.

이번 사태를 겪으며 샤머니즘 또는 무속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기도 했다. 무속인들 특히 무당의 처지에서는 분통 터지는 일로 보인다. 한국 무신교총연합회 대표는 "무당 최순실"이라는 표현은 무속인의 ‘명예훼손’이라고 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무교의 자정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한편에서는 ‘세속’의 삶을 더러움으로 치부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어떤 성스러운 것을 ‘종교’에서 찾아온 데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대개 무당의 영험함을 신령이나 죽은 이들을 살아 있는 이들과 소통시키는 사제 또는 영매로서의 역할보다는 점쟁이의 그것으로 내몰아 가는 우리 사회의 조급함과 물신주의가 ‘생계형’ 무속인을 낳는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신이나 신령을 모시고 기도도 드리지만 ‘데리고 놀기도 하고 또 부리기도 한다’는 무당은 삶을 중심으로 인간과 신을 차별없이 만나게 한다. 이렇게 보자면 ‘성과 속’을 가파르게 나눠 온 종교성을 인간화시킬 수 있는 ‘인간중심의 종교성’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상을 구원이 완전히 실현된 그 자체로 보지 않으면서도 그 긴장 안에서 늘 새로운 변화 의지를 키워 가는 그러한 영성을 무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한 긴장은 앞서 얘기한 것으로 한다면 우리 삶에서 늘 광장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광장은, 그곳의 함성은 우리를 오라고, 와서 보라고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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