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만원 버스에서

만원 버스다. 이미 창문까지 밀려서 엉거주춤 서 있는 저 승객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틈새는 잘 안 보이고 문은 닫히려 하니 진퇴양난이다. 일단 발이라도 어깨라도 밀어 넣어야 한다. 구겨지는 옷과 체면은 잠시 잊자. 일단 타고 나면 도착할 때까지는 안심이다.

그런데 닫히려는 버스 문을 누군가 탕탕 두드린다. 안 그래도 비좁은데 반갑지 않다. 빨리 문을 닫고 출발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갈 수 있을 테니.

그토록 세상은 비정하다. 모든 것이 경쟁인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나까지는 버스를 타야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겨우 꼽사리 낀 버스에서 느끼는 작은 안도감, 낙오하지 않았다는 위안으로 보람을 삼는다.

2. 국가라는 버스 회사

억지로 비집고 밀고 외면하면서 서로 민망해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있다. 이번 버스를 놓치더라도 다음 차가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고, 앉아 갈 수 있는 자리가 넉넉하다는 게 확실하다면 굳이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다. 잠시만 기다리면 품위있고 우아하게 나를 목적지로 실어 줄 버스가 올 테니까.

그처럼 한번 승차에 실패하거나 낙오해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도록 준비된 다음 버스를 일컬어 사회안전망, 사회복지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국가라는 공적 조직의 존재 이유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고난을 함께 견뎌 낼 수 있도록 한다는 역할 없이 설명될 수 없다. 개인과 개인의 경쟁이 도를 넘지 않도록 관리하고, 공정한 경쟁을 촉구하며 다음 차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에 속한다.

▲ 해외 순방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3. 미친 운전기사와 얌체 승객들

그런데 우리가 탄 버스 운전대가 정신 나간 운전기사의 손에 맡겨져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버스의 노약자석은 떡대 좋고 게으른 청년들이 차지하고 있고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처자도 알고 보니 술배 나온 아저씨다. 어떻게 하겠는가. 빨리 저 미친 기사의 손에서 운전대를 빼앗아야 하고, 얌체 승객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정신 나간 폭주 운전자를 멈추어야 한다며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에 비한다면, 적어도 법과 절차에 따라서 미친 운전기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일이 그리 힘든 일도 아니다. 찬바람 맞고 귀한 주말 시간에 생돈을 날려 가며 거리로 나가는 것쯤은 감당해 낼 만하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운전자의 문제를 알아챈 시민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4. 버스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와중에 버스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길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아예 버스를 탈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내몰린 사람들,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 거세지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한다. 농민들과 해고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있다. 엇나간 에너지 정책으로 잠재적 피해자가 될 이웃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교회는, 아니 우리는 정신 나간 운전자의 문제를 지적하는 가운데 버스에 타지 못하는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운전자만 교체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얌체들만 몰아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금의 사태는 궁극적으로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이루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차를 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전환이 필수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