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따라 길 따라', 신앙의 빛, 역사의 길 따라 걸은 4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독자들이 지난 2013년부터 시작한 순례 모임 ‘빛 따라 길 따라’(이하 빛길)가 어느덧 4년의 능선을 넘기면서 지난 11월 12일과 13일 제주 순례길에 나섰다. 이들의 순례는 전통적인 "성지"뿐 아니라 민중의 고초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찾는 독특함이 있다.

제주 일정은 강정마을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 들러 제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해군기지 앞 천막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시작해 제주의 역사와 신앙의 현장을 돌아봤으며, 12일 저녁에는 제주 시청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온 생애와 역사가 만나는 일이고, 서로의 일생을 이해하면 더 풍부하게 관계를 맺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지역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순례지로 시작한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는 부관장 부재환 신부의 안내로 제주 탄생 설화부터 강정해군기지까지 제주의 역사 이야기를 들었다.

부 신부는, 제주의 역사에 대해 알고 공유한다면, 더욱 풍요로운 만남이 될 것이라면서, 고려시대 몽골 침략에 저항한 제주 삼별초 항쟁과 이후 몽골의 지배, 천주교의 전래와 신축교안, 4.3항쟁과 해군기지에 이르기까지 제주민들이 겪었고, 또 현재도 겪고 있는 고난과 학살, 공동체 파괴에 대해 설명했다.

▲ 제주 4.3평화공원 전시관을 돌아보는 참가자들. ⓒ정현진 기자

부 신부는, 특히 4.3항쟁은 소외된 지역으로서 제주의 강한 공동체 문화를 뒤흔든 사건이며, 외침이 아닌 국가공권력에 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었다면서, “4.3의 이러한 비극은 현재 강정에서 해군기지에 의해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를 통해 강정 마을 공동체와 대중적이고 폭넓은 평화운동을 장기적으로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며, “이제는 누구를 위한 해군기지인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위한 평화운동이냐는 질문으로 돌리고, 찬반 논리를 넘어 지역민의 정서와 제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두고 더 깊이 소통하려 애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해군기지 앞 천막미사를 봉헌한 뒤 이틀간 제주4.3평화공원,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의 묘인 황사평 성지, 1950년 정부의 불법적 ‘예비검속’으로 252명이 계엄군에 총살당한 터인 섯알오름 학살터와 이들 중 132위를 수습해 안장한 백조일손지묘, 1901년 농민항쟁(신축교안) 당시 장두로 나섰던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을 기리는 비인 대정 삼의사비, 황사영의 아내로 제주로 귀양 온 뒤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살았던 정난주 마리아 묘소, 추사 김정희 유배지 등을 돌아봤다.

▲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등 삼의사를 기리는 제주대정삼의사비. 비 뒤에는,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생겨나는 폐단에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신축교안 내용이 새겨져있다. ⓒ정현진 기자
빛길 길라잡이인 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운영위원장 유선근 씨(스테파노)는 순례지를 안내하며, “이번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공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않을 때의 비극이 무엇인가 성찰하는 것이며, 현재 시국에 대해서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축교안 역시 정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외세인 천주교의 오만방자함으로 민란이 일어나 그 피해를 고스란히 제주도민과 교인들이 입었던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4.3과 예비검속, 최근 제주해군기지까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공동체가 분열되는 비극적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개탄과 분노를 금치 못한다”며, “반복되는 역사를 잊지 않고, 잘못된 국가공권력에 저항하며 바른 공권력이 서도록 행동하자는 메시지가 이번 순례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했다.

순례에 참여한 한현실 씨는, “이번 제주 순례에서 억울하게 당한 민중의 고초를 보고 새삼 숙연해졌다”며, “특히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현실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억울한 민중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 역사적 진실규명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빛 따라, 길 따라’ 이름처럼 신앙의 빛을 따라 삶의 길을 찾는 순례였죠.”

한편 빛길은 2013년 4월, “독자들의 친교 공동체를 통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힘이 되고자 한다”는 전 운영위원장 유선근 씨(스테파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한 달에 한 번 서울과 경기권을 비롯한 원주, 춘천, 광주, 제주 등 지역의 천주교 성지와 역사 현장을 돌아보는 순례에는 평균 20여 명의 인원이 참석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등 주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순례였지만 일정은 가톨릭 성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코스는 서대문형무소와 경교장, 서소문성지와 중림동 성당을 아우르며, 근현대사 현장과 성당, 성지를 돌기도 했고, 어떤 길은 운현궁에서 천도교중앙대교당과 가회동성당, 와룡공원 등을 거치며 이웃종교와 만나기도 했다. 또 세월호 참사 2주기에는 진도 팽목항을 찾아 기도하고, 어느 5월에는 광주 5.18묘역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을 다시 만났다.

이렇게 4년간 30여 회의 순례를 통해 참가자들은 신앙의 선조와 역사의 현장, 때로는 이웃종교인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나누는 작고 단단한 공동체를 이뤘다.

▲ 황사평 순교자 묘지.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교인들이 묻혀 있다. ⓒ정현진 기자

빛길 순례의 길라잡이였던 유선근 씨는 매번 일정을 짜고, 관련 서적을 사 공부를 하며 빛길을 위한 코스를 짜고 안내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는 순례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전국의 성지와 역사유적지를 순례하면서 균형 잡힌 신앙감각과 역사의식을 배워 일상의 실천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며, “우리가 역사교과서나 교리서를 통해 지엽적이고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그 이면의 진실, 다른 면모를 같이 공부하면서 더 풍성한 진실에 접근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신앙인으로서는 이른바 일반교리와 사회교리의 온전한 배움과 실천 그리고 시민으로서 지식과 삶의 일치를 순례길을 통해 모색한 셈이다.

권정옥 씨는 순례에 대해 “누군가 순례에 오면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재밌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늘 올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배우는 기쁨이 컸다”고 말했다.

원주에 살면서도 주로 수도권 일정인 순례에 열심히 참여했던 김홍기 씨(마태오)는 “신자임에도 전혀 몰랐던 성지, 교회와 역사의 현장이 너무 많았다. 그런 곳들을 찾아 알게 되고, 또 이슬람 사원 등 다른 종교를 만날 수 있어 정말 좋았다”면서, “다만 더 많은 이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더 많이 동참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 1950년 예비검속으로 262명이 학살당한 섯알오름터. 학살 뒤 주검을 구덩이에 암매장했으며, 6년 뒤에야 일부가 수습될 수 있었다. ⓒ정현진 기자

개신교 신자로서 참석했던 한현실 씨는 “이 빛길 모임은 예수의 언행을 닮겠다며 애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좋은 실천 모델이 되지 않을까 늘 생각했다”며, “개신교 모임에서도 이 빛길을 소개하고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빛길은 이번 제주 순례를 기점으로 당분간 쉼표를 찍는다. 하지만 “중단은 절대 안 된다”는 참가자들의 빗발치는 요청으로 쉬는 동안 지난 4년을 평가하면서 ‘빛길 시즌2’를 어떻게 열지 모색할 계획이다.

유선근 씨는 “순례의 큰 의미가 있었다면, 모든 참가자들이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 가치를 나누고 더 크고 풍부하게 만들어 줬던 것”이라며, “그동안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고, 바람이 있다면 다른 이들도 각자의 현장에서 지인들과 함께 우리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며 빛길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전했다. 

▲ 12일 저녁, 제주시청 앞에서 함께 촛불을 들었다.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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