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1월 20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루카 23,35-4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유대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조롱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이것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승리감과 안도감을 담아서 그분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라고 조롱합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 알라는 조롱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명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 총독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처형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분이 과연 메시아인가 상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인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당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6,1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으셨고, 군중은 드디어 그분을 포기합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여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고, 사형을 집행할 권한을 가진 로마 총독에게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왕으로 와서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는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에서 해방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들어서,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한다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메시아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며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 주는 메시아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초기 신앙인들은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그런 호칭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초기 신앙인들은 그분을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왕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들이 그분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를 때, 그 뜻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인간이 율법 준수를 잘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인간 소원을 성취할 대상인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 당신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당신도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 곧 새로운 질서의 나라를 열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의 생존을 최대 과제로 삼고, 노력하다가 죽어서 사라지는 우리의 세상에,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 곧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기본 질서가 된 나라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 기본 질서인 나라입니다.

그 지평에서는 지켜야 할 계명이나 바쳐야 할 제물이 절대적이 아닙니다. 그 지평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불쌍히 여기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 지평에서는 은혜로움이 살아 움직입니다. 은혜로움이 돋보이는 지평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의 나라를 새롭게 창시한 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 곧 은혜로움을 기본으로 한 질서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듯이, 그분의 자녀 된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의 나라를 창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몸 잘 살고,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으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인간 생명의 한계, 곧 죽음 앞에서도 그분은 하느님을 부르며 당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은 인간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도 하느님은 그분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 안에 읽을 수 있는 하느님나라의 질서를 배우고 실천하며 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도 그분이 열어 놓은 지평에서 그분이 창시한 나라의 질서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처형된 죄수 두 사람이 있었다고 알립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낙원은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열어 놓은 새로운 지평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예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을 왕,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내 하인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18,36) 예수님이 창시하신 나라는 싸우고 정복하고 빼앗아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열어 놓은 그 나라의 새로운 지평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빌면서, 은혜로움이 살아 움직이는 그 나라의 질서를 실천하며 삽니다.
 

오늘로 서공석 신부의 강론 연재를 마칩니다. 매주 하느님나라와 복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강론 게재를 허락해 주신 서공석 신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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