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양극화, 이제 얘기할 때

(마시모 파졸리)

미국 가톨릭 신자의 절반을 조금 넘은 다수(52퍼센트)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해 그가 당선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는데, 그의 공약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와 정반대 편에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4년간 미국 가톨릭교회와 바티칸,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 간 관계에 어떤 일이 있을지 흥미롭게 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의 (가톨릭과 갈등이 있다는) “가톨릭 문제”가 위키리크스 문건이 공개되면서 부각되었지만, 막상 트럼프의 가톨릭 문제는 더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이메일에서 클린턴 선거팀의 포데스타는 가톨릭을 “후진적”이라거나 “중세적”이라고 표현해서 미국 교회의 보수적 주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 문서를 (민주당이 지닌) 가톨릭에 대한 깊은 적대감의 증거로 보는 이들이 있지만, 그 직후 많은 평론가들은 이러한 표현은 가톨릭 내부의 격렬한 논쟁을 반영할 뿐이라고 잘 설명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더 중요한 점은 (이 문건보다는) 힐러리가 국무장관으로 4년간 지내면서 한 번도 바티칸을 방문하거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만난 적이 없다는 로버트 미켄스의 지적이다. 이는 40년 전 닉슨 행정부 때 윌리엄스 로저스 국무장관이 그랬던 이래로 처음이다.

어쨌든 그 논란은 지금 바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은 포데스타 이메일에 대한 반응은 또 하나의 가톨릭의 봄 운동을 반영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 이래 나타난 “가톨릭의 봄”(Catholic spring)과는 달리 지난 30여 년간에 걸쳐 개신교 전통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로 이뤄진 흐름이다.

이러한 이들의 흐름은 뚜렷해서, 미사 참석자에서부터 신학 세계, 그리고 정치 문화와 대중문화에까지 변화를 줬다. 하지만 교회는 이 흐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하기가 어려운데,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제2차 바티칸공의회 뒤에 형성된 교회일치의 (타종파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가톨릭은 개신교 등에서의 개종자는 받아들이지만 그러한 개종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또한 이 흐름은 미국 가톨릭교회 내부의 양극화와도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다. 즉 보수적인 개종자들과 진보적인 모태신앙인들 간의 양극화라고 가정된다. 그리고 또한 이 문제를 잘못 다루면 원래는 지적, 영성적으로 다양하고 다면적인 개념인데 자칫 단순화되어서 이러저러한 교회 담론에 이용될 수 있다.

▲ 십자가.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임 중반기부터 미국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바뀌는 데 기여한 이들 개종자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할 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여러 방향에서의 개종자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 가톨릭교회에서의 “문화적 개종”이나 20세기에 많은 유럽 가톨릭 지식인들이 보여 줬던 “오리엔탈리즘”(이 흐름은 유럽 교회를 “동방화”(orientalize)했으나 동방 정교회로의 개종 물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과는 다른 현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1970-80년대에 다시 유행했던 보수주의와, 그리고 정교회 안에서 정치적 이유로 추동된 신전통주의와 비교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이 현상에 대해 얘기해 볼 좋은 때로 보인다. 특히 트럼프의 당선에 비추어 우리가 교회 안의 양극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렇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 문제도 중요하다. 가톨릭 안의 진보파들이 바라는 “가톨릭의 봄”과 앞서 말한 개종자들이 바라는 “가톨릭의 봄”,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프란치스코 교황과 미국 가톨릭교회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이들 개종자라는 주제가 특히나 다루기 어려운데, 다름 아니라 유명한 이들 개종자 상당수가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교회를 보고 가톨릭으로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아직 보고 있지는 못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톨릭교회를 보고 개종하는 이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는 예전에 교회를 떠났다가 이제 다시 돌아온 “개종자”들도 있지 않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과 영성은 (진보적인 미국의) 모태 가톨릭신앙과 똑같다기보다는 그를 넘어서서, 세속화된 세계를 마주보는 데 훨씬 더 적합해 보인다. 개종자들에게는, 베네딕토 16세의 지적, 신학적 세련미와 그가 보여 준 “창조적 소수들”이라는 교회론이 더 매력적이었다. 덧붙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개종과 교회의 (보수적) 변화 현상이 큰 문제가 아니었던 (남미) 교회 출신이다. 유럽에서처럼. 그리고 그는 이러한 개종자들이 바랄 만한 방식으로 이들과 연결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황의 에큐메니즘은 비 가톨릭인들을 향해 말하고 있고, 또한 가톨릭교회 안의 서로 다른 가톨릭 정체성들을 향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은 가톨릭 내부의 에큐메니즘이다. 지난주에 그가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우리가 보았듯, 그의 교회일치 대화의 파트너들은 루터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교황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신가톨릭신자(neo-Catholics)라는 소수 강경파 집단에 속한 가톨릭인들도 그 대화의 파트너였다. (프란치스코식) 개종의 이 요청은 프란치스코의 전임 교황들 시기에 가톨릭신자가 된 이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것 같다.

(마시모 파졸리는 빌라노바 대학의 신학/종교학과 교수다.)

기사 원문: https://www.commonwealmagazine.org/blog/progressive-%E2%80%98catholic-spring%E2%80%99-its-predec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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