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 토마스 아퀴나스의 당당한 행복

국어사전에서 ‘희망’을 찾는다. 잘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짐, 이것이 희망이다. 반대는 절망이다. 바랄 것이 없어 희망을 끊어 버린 상태다. 요즘 사람들은 절망을 산다 한다. 희망을 끊어 버린 지옥 말이다. 행복을 향한 희망이 깊은 외상을 입은 시대, 우린 그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을 행복 바로 그 자체라 생각한다. 비선조직을 활용해서라도 돈을 벌려 한다. 편법이 비법(秘法, 비밀스러운 신비한 해결책)이 되어 가는 시대, 윤리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보다 못한 시대, 한 사회의 행복을 돈이란 기준으로 생각하는 시대, 풍요 속에 살지만, 행복을 말하지 못하는 시대, 바로 우리의 시대다. 행복이란 결국 영혼이 누리는 만족감이며, 그 영혼의 만족감은 혀에 달고 눈에 화려한 것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린 지금 당장 쉽게 누리는 혀와 눈의 좋음을 선택한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글을 보자.

“돈은 그저 쓸모 있는 것이지만, 누구나 돈을 따르게 한다는 보편적인 성질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돈이 행복과 유사한 면을 가지기 때문이다.” ("악에 대하여" 13, 3, ad 2)

돈은 많은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13세기도 21세기 지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돈은 행복의 수단일 뿐, 행복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영혼은 돈으로 산 달콤한 음식이나 화려한 옷이 아닌 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명예(honor)가 참다운 행복인가? 아니다. 그러면 인기 혹은 명성(fama)인가? 아니다. 이러한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것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외부에 의존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진짜 행복은 주체적이어야 한다. 외국 군대에 의존한 국방력이 참다운 힘이 아니며, 외국의 철학에 의존한 철학이 참다운 철학이 아니듯이 말이다. 권력(potestas)도 마찬가지다. 행복 그 자체가 될 순 없다. 토마스는 하나씩 나열하며 행복인지 따진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베노초 고촐리. (1471)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토마스는 행복이란 자기 이성으로 결단하고, 자기 의지의 올바름(rectitudo voluntatis)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했다. 돈이나 명성과 같이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결단, 그 결단이 행복의 조건이라 했다. 그렇기에 매순간 이성과 의지는 부지런히 자기 행위를 결단해야 한다.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닭과 같은 짐승과 구분되는 인간 본질에 적합한 행복이다.

“인간의 행복은 인간에게 고유한 좋음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복을 동물이 누린다는 이야기는 쓸데없는 말이다.” ("대이교도 대전" 3, 27)

인간은 닭이나 쥐와 달리 이성으로 결단하고, 그 대가로 행복을 누린다. 그리고 그런 행복은 이기적이지 않다. 더불어 있음이다. 공공선을 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다운 행위’(actio humana)를 다룬다. 우연히 일어난 ‘인간의 행위’(actio hominis)가 아닌 이성의 결단에 의한 ‘인간다운 행위’가 행위자에게 참다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올바른 이성에 의한 '인간다운 법'(인정법, lex humana)은 공공선을 향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좋음이 아닌 모두의 좋음을 향한단 말이다.

“모든 인간다운 법은 공공선을 목표로 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법의 권위와 본질이 있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법은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신학대전" 2부 1, 96, 6)

‘인간다운 법’은 신의 영원한 이성에 의한 ‘영원법’(lex aeterna)에 근거한다. 신은 강자의 이득을 사회적 정의로 세우지 않았다. 처음부터 공공선을 원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이 인간에게 남겨진 ‘하느님의 모상’에 충실하다면, 인간 역시 이기적인 ‘홀로 잘 있음’보다 당연히 ‘더불어 잘 살기’를 원하게 된다. 이것이 온전한 이성이 구현된 법이며, 이러한 법이 구현된 사회는 당당하게 행복한 사회가 된다. 외부에 의하여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 이성으로 사유하고 자기 이성으로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회 말이다. 당당한 행복이 상식인 사회 말이다.

이러한 이상향은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인간에겐 힘든 꿈이다. 하지만 꿈을 향하여 매순간 결단하고 궁리해야 한다. 현실 공간에서 인간과 사회는 절대적인 행복을 가지지 못한다. 신과의 합일이 현실 공간에선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절대 행복을 향하여 끝없이 나아가는 여정에 행복이 있다. 그 여정의 행복이 우리 삶의 행복이다. 그 여정은 스스로의 이성과 의지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남의 탓을 하며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다운 모습이 아니다. 당당하지 않다. 정치인 역시 마찬가지다. 성실하게 국민과 공공선을 궁리해야 한다. 홀로 몇몇 비선조직과 편법을 비법으로 알며 정치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결국 자신들의 이기심을 추구하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편법은 비밀스러운 해결책인 비법이 아닌 법이 아닌, 불법의 비법(非法)일 뿐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성으로 듣고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책임져야 한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 자리를 포기하는 것도 선행이다. 이것이 ‘인간다운 행위’의 당연한 결과다. 어두운 세상 희망을 가지는 첫 시작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마지막 한마디를 함께 읽으며 마친다.

“많은 이를 지배하는 권력이 잘 이루어지면 최선이지만, 남용이 된다면, 최악이다!”("신학대전" 2부 1, 4, ad 2)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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