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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찰나의 성공을 음미하며, 떡국[부엌데기 밥상 통신 - 25]
정청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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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03  09: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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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따듯한 아랫목에서 빠져나오기 싫어 이불을 감싼 채 꾸물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신랑이 소리쳤다.

"서리 내렸어요, 서리!"
"엥? 벌써요?"

깜짝 놀라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벌써 서리라니! 때는 벌써 입동을 코앞에 바라보고 있으니 서리가 내리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서도 그동안 늦가을답지 않게 날씨가 따듯했던 관계로 방심을 하고 있었나 보다. 아직 집 앞에 심은 고구마도 덜 캤는데 서리 맞아도 괜찮으려나? 감나무에 감도 덜 땄는데, 토란대도 베서 말려 놓았어야 했는데....

괜시리 다급한 마음이 들어 초조해하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신이 났다.

"엄마, 울룩불룩한 겨울 잠바 꺼내 줘. 장갑이랑 목도리도!"
"이따 해님 나오면 나가지 왜!"
"서리 내렸다며.... 그거 눈 같은 거 아니야? 내가 눈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가 서리는 눈이랑은 다르다고 몇 번이나 얘기해도 다울이는 다랑이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다가오는 추위에 바짝 움츠러드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다. 그런 아이들 모습이 내심 부러우면서도 나는 좀 더 추워지기 전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떠올라 조바심이 난다. 일단 생강차 끓이고 고구마 쪄서 아이들 아침 먹이고, 세탁기 돌려서 빨래 널고.... 오늘은 기필코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대대적인 옷 정리와 기타 잡다구레한 일들을 해치우겠노라 굳게 다짐을 했다. 그런데! 신랑이 나를 부른다.

"실이랑 바늘 들고 빨리 나와 봐요. 나락망에 팥을 널어 놨는데 간밤에 쥐가 망을 여기저기 물어뜯어 놨네. 어서 구멍 난 데 구멍 좀 막아 봐요."

안 그래도 할 일이 수두룩한데 쥐까지 일을 만들어 주고 갔다. 해가 날 때 팥을 널어 말리려면 서둘러 망에 난 구멍부터 메워야 할 터, 나는 할 수 없이 당장 하려던 일을 뒤로 미루고 나락망 앞에 앉는다. 대체 구멍을 몇 개나 낸 거야? 엥? 50원짜리부터 500원짜리까지 갖가지 크기의 동전만 한 구멍이 수도 없이 많다. 다 꿰맸나 싶으면 또 있고, 다 꿰맸나 싶으면 또 있다!

'할머니 탐구생활'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바느질하고 별로 안 친하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 땀씩 차곡차곡 손으로 내딛는 한 걸음이 못 견디게 답답하기만 하고 그래서 더욱 손이 안 간다. 그런 내가 할 수 없이 바늘을 잡았는데 이 놈의 구멍은 끝도 없이 발견되고, 파리 떼까지 들러붙어 성가시게 하는 통에 속에서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생쥐 이 녀석 잡히기만 해 봐라. 아궁이에 화형을 시키고 말 테다. 아니, 보들이 밥 그릇에 던져 줄까? 아니야, 다시는 이런 짓 못 하게 이빨을 왕창 뽑아서 친구들 품으로 돌려보내야지. 내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소문이 나면 다른 생쥐들도 무서워서 벌벌 떨 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씩씩거리다가 문득 추운 날 방에 들어온 생쥐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는 권정생 선생님 일화가 떠올라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러다가 또 다시 발견된 구멍 앞에서 다시 짜증이 요동을 치자 이번에는 옛날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나는 콩쥐다. 나무 호미로 돌밭에서 풀을 매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며 슬피 울던 콩쥐다. 나는 당금애기다. 젓가락으로 쌀알 서 말 서 되 세 홉을 일일이 주워 담던 당금애기다. 나는 바리데기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검은 빨래가 희어질 때까지, 흰 빨래가 검어질 때까지 빨고 또 빨던 바리데기다....'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 속 여성 주인공들의 시련이 정말 생생하게 살갗에 와 닿았다. 밭 매기, 빨래, 물 긷기, 청소.... 그런 허접하고 자질구레한 일거리들이 그녀들을 얼마나 큰 고통 속에 빠뜨렸을까. 하지만 묵묵히 그 일을 해냄으로 그녀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남았고,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저 묵묵히 한 걸음씩 가 보자. 끝도 없는 구멍을 메워 보자. 자, 구멍아, 와라!

   
▲ 겨우내 먹을 고구마. 찬바람이 불면 호호 불어 먹는 고구마만 떠올려도 힘이 솟는다. ⓒ정청라

결국 구멍을 다 메워 까만 나락망에 수술 자국 같기도 하고 지도 같기도 한 하얀 무늬가 남았다.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지만 나 혼자 뿌듯해하며 사진이라도 찍으려던 차에 시간을 보니 어느새 11시다. 아이고, 벌써 점심 준비해야 할 시간이구나. 이렇게 바쁠 때는 누구한테 밥 좀 얻어먹고 싶고 간단히 전화 한 통으로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랴. 쉽고 편하게 살기를 바랐다면 애초에 지금 여기에 나는 없을 것이므로, 나는 온 힘을 다해 나에게 던져진 이 공을 받아 쳐야 하는 것을!

나는 투수가 던진 공을 받아치는 타자와 같은 기세로 부엌에 섰다. 어제 저녁에 한 밥이 네 식구 먹기에 살짝 모자랄 것 같아서 떡국을 끓이기로 했다.(우리 집에선 밥 양이 애매하게 모자라거나 너무 바빠서 밥 하기 어려울 때 간편식으로 주로 떡국을 한다. 냉동실에 쟁여 둔 가래떡을 떡국 떡 모양으로 얄쌍하게 썰어서....) 자, 그럼 끓여 볼까?

우선 받아 놓은 쌀뜨물에 큼지막한 다시마 조각과 애호박, 감자 듬뿍 넣어 푹 끓인다. 그리고는 끓는 동안 떡을 썰어 물이 팔팔 끓으면 다진마늘, 부추 등과 함께 넣고 국간장과 들깨가루로 간을 하여 끝!(마침 달걀이 한 알 남아 있어 그것도 넣었는데 달걀을 넣으면 고소하고 안 넣으면 더 개운한 맛이 난다. 또, 한 가지 팁을 알려 주자면 야채와 다시마를 듬뿍 넣고 푹 끓이면 따로 다싯물을 빼서 끓이지 않아도 감칠맛 나는 국물 요리가 된다. 그동안 나는 국물 요리는 꼭 멸치 육수든 뭐든 다싯물을 내서 끓여야 맛을 낼 수 있다는 망령에 시달려 왔는데 얼마 전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싯물을 내서 끓이면 더 맛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맛있다.) 밥통에 있던 밥은 들기름, 소금, 된장, 검은깨, 부추 넣고 비벼서 뚝딱뚝딱 우악스런 주먹밥도 만들었다.

"얘들아, 얼른 와라. 밥 먹자. 아빠도 오시라고 해!"

상을 차리고 나자 아이들이 뛰어들어왔다. 고구마를 캐다 온 터라 배가 고팠는지 떡국을 더욱 반가워하는 아이들.... 마침내 신랑까지 밥상에 앉아 온 식구가 숟가락을 들자 비로소 나는 마음을 놓는다. '아,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구나.' 하는 안도감이랄까?

힘들어도 묵묵히 한 걸음씩! 결국 정답은 그것뿐이다. "모모"에서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다음 한 걸음만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 밥 먹고 나면 또 해야 할 일들이 줄을 서고 있고 언제쯤 일이 다 끝날지 짐작조차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따듯한 떡국 한 숟갈을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야호! 다만 이 순간 이 한 걸음만은 성공이다.'

   
▲ 떡국 한 그릇에 차가운 바람에 움츠러든 몸과 마음이 녹는다. 든든하게 먹고 다시 한 걸음 내딛자!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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