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꺼진 교회당과 가난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그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를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난 5월 9일 2시부터 홍익대학교에서 조형관에서 홍익대 성화감상회 주최로 '플러그 인, 기독교 미술의 현대적 의미'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특별히 렘브란트와 반 고흐, 앤디 워홀의 그림을 통해 성경의 메시지를 읽으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다소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날 포럼은 대중적 신앙에 어필하기 위한 것처럼 지나치게 '신앙'을 강조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 측면도 있었으나, 김학철 교수의 '후기자본주의 속의 종교와 예술'이란 제목으로 앤디 워홀의 그림을 분석한 것과 김상근 교수의 반 고흐에 대한 소개는 그 명쾌함에서 돋보이는 발제였다. 특히 김상근 교수의 발제는 반 고흐의 신학적 배경과 교권주의에 대한 태도, 그림에 나타난 신앙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상근 교수에 따르면, 네덜란드 출신의 반 고흐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으며, 반 고흐가 초기에 교습을 받았던 스트리커 목사 역시 그의 숙부였다. 스트리커 목사는 네덜란드에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나자렛 예수>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인간 예수의 생애'를 집필한 학자였다. 그는 신앙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했으며, 그 핵심을 산상수훈에서 찾았다. 즉, 기독교적 삶이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 고흐는 초기에 열렬한 복음주의자였는데,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르낭의 <예수전>을 탐독했다. <준주성범>을 통해 자기를 부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승에서 순례자로 살아야함을 배웠다. 고흐는 <천로역정>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말한다. "이 땅에서 우리는 순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먼 곳에서 왔으며 먼 곳으로 가려합니다. 삶이란 여행길은 따스한 어머니 품안에서 출발하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팔에 안길 때까지 이어집니다. 지상의 만물은 변화하며, 영원한 도시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영향은 르낭의 <예수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워지려면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희생하고 종교를 조국으로 삼아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윤리적 요청에 반 고흐는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그가 학업을 포기하고 평신도 신분으로 벨기에의 광산촌 보리나주에 선교사로 갔다. 거기서 헐벗고 사는 광부들을 만나면서 안온한 숙소를 버리고 오두막집에 살며 광부들처럼 냉방에서 잠을 청했다.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려던 반 고흐는 옷가지도 다 나눠주고 양말도 신지 못한 채 연단에서 설교를 했다. 그때 한 광부의 아내가 "왜?"냐고 물었다. 고흐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저도 가난한 이들의 친구입니다." 그는 광부들의 신임을 얻은 대신에 교단의 비난을 받아 더이상 선교사로 일할 수 없었다. 그후 그가 잡은 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종교 없이. 그러나 종교를 속에 품은 채.
김상근 교수는 반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종교적 이미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반 고흐가 보리나주에서 선교사 자격을 정지당하고 교권에 절망한 뒤에 종교이탈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의 종교적 신념은 그림을 통해 드러났다. 그 첫번째 이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먼저 매춘부였던 시엔과 그녀의 딸 마리아에 대한 연민으로 시엔과 결혼하고, 그 시선이 <시가를 쥐고 난롯가에서 바닥에 앉아 있는 시엔>이나 <뜨개질 하는 여인과 소녀>, 슬픔에 나타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루한 환경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광부와 농부들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는 잘 팔릴 수 있는 '성자'의 그림을 그리라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가족들이 호롱불 아래서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아 있는데, 마치 성만찬을 행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고흐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똑같이 임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벽에 걸린 십자가를 그려넣었다.
한편 고흐는 <씨뿌리는 사람들>을 무려 30회 이상 그렸는데, 그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그 작품을 모사하면서 농부들의 삶을 자주 그렸는데,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밀레에게는 복음이 있거든. 밀레가 그린 그림이 훌륭한 설교와 무엇이 다르냐? 제법 괜찮다는 설교도 밀레의 그림에 비교하면 검게 보인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을 통해 자신이 복음의 씨를 뿌려서 백배로 열매맺는 날을 고대했다.
또한 고흐의 그림에는 순례자의 길이 많이 등장하고, 그 주변엔 올리브와 측백나무가 즐비하다. 그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영원한 도성을 향한 순례자의 길로 여겼으며, 그 길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가야할 길이었다. 그리고 올리브산은 예수가 수난 전에 계셨던 곳이며,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낸다. 그리고 대낮에 해바라기가 해와 같은 하느님을 한없이 갈망하듯이, 밤에는 불타오르는 듯한 측백나무가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종교적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별' 역시 그에겐 종교적 표상이었다. 그는 말한다. "종교라는 말을 입에 올려도 될 지 모르겠지만... 종교를 필사적으로 갈구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밤에 밖으로 나가 별을 화폭에 담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교회당들은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이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질까봐 성직자가 되려는 자신의 순수한 열망을 비판했던 목사였던 아버지의 위선적 행동, 아직 보잘것없던 고흐와 자기 딸의 교제를 극구 반대했던 스트릭커 목사, 보리나주에서 자신을 쫓아냈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교단 등은 그로 하여금 교회를 위선과 자기 기만의 장소로 여기게 했다. 가르침과 행실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흐는 교회를 성령의 불이 꺼져 있는 캄캄한 곳으로 묘사한다.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도 마을의 작은 집 창문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교회만 불이 꺼져 있다. <오베르성당>도 짙은 어둠만 보여준다.
고흐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셍 레미에서 그린 그림은 놀랍게도, 그러나 당연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었다. <나사로의 부활>, <피에타>, <선한 사마리아인>, <영원의 문에서> 등이다. 고통 속에서 부활하는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은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자였다. 그리고 간절히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자였다.
김상근 교수는 마무리하면서 "예술은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에 대한 상상력의 시각적 표현이다. 진실에 대한 상상력이란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삶의 현장을 초월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개방적 전망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