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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최고야![부엌데기 밥상 통신 - 24]

큰일 났다. 김치가 떨어졌다. 지난해 김장 김치는 봄에 이미 다 먹었고, 그동안 친정 엄마가 담가서 보내 주신 김치, 해남 외할머니네서 가져온 김치, 앞집 할머니가 주신 김치 등을 먹어 왔는데 드디어 동이 나고 만 것이다. 예년 같으면 지금쯤 배추나 무 솎은 걸로 새 김치를 담가 먹을 때인데, 벌레들의 대활약으로 쌈 싸 먹을 푸성귀마저 아끼고 있는 처지라 눈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밥상 한구석이 뻥 뚫려 버린 허전함이랄까? 아니, 밥상을 지탱하던 다리 하나가 똑 부러져 버린 느낌이랄까? '이게 뭐야, 김치도 없이 부엌데기 밥상 어쩌고저쩌고 한단 말이야?' 싶어 자존심에까지 금이 갔다. 농사짓고 산 지 10년 남짓 됐는데 김칫거리 농사 하나 제대로 못 지어 김치를 떨어뜨리다니!

당황스러움과 아찔함에 멀리 있는 친정 엄마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체면 불구하고 앞집 할머니한테 김치 동냥을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 배추가 아니면 어떠랴. 들에 지천인 민들레 이파리나 왕고들빼기라도 뜯어서 김치를 담그자. 지금이말로 입맛을 야생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풀밭과 텃밭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느라 애를 쓰고 있는 밭을 빙 둘러보았다.

그때, 고구마 밭이 눈에 들어왔다. 오, 저거다 저거! 여름 내 가뭄으로 맥을 못 추다가 이제서야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탐스럽게 뻗어 나가고 있는 고구마 줄기! 고구마 줄기로는 된장 넣고 새콤달콤하게 나물을 무쳐 먹어도 맛있지만 김치를 담가 먹으면 그 맛이 별미다.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기가 성가셔서 그렇지 손질해서 김치 담그면 민들레나 왕고들빼기보다는 훨씬 쉽게 손이 갈 거다.

나는 친정 엄마가 해 주시던 고구마 줄기 김치 맛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모름지기 음식이란 내가 먹고 싶어야 하게 되는 법, 나는 고구마 줄기를 벗겨 내는 수고 정도는 무릅쓰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얼른 와라, 고구마 캐자!"
"고구마? 와, 신난다."
"나도 할래, 나도!"

'고구마'란 말에 마당에서 장군 놀이를 하던 다울이 다랑이가 번개처럼 달려왔다. 그리하여 셋이 같이 고구마를 네다섯 포기 캐고, 캘 때 뽑은 고구마 줄기 무더기를 마당 한가운데로 끌어왔다.

"이건 뭐 하려고?"
"김치 담글 거야. 껍질 벗기는 게 번거로워서 엄마가 나물 반찬도 거의 안 해 줬는데 사실 고구마 줄기가 엄청 맛있는 거야. 이걸로 김치 담그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하지. 엄마가 줄기 손질하는 법 가르쳐 줄 테니까 여기 앉아서 같이 하자."

나는 다나를 품에 안은 채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승부욕이 강한 다울이를 자극하기 위해 "여기는 고구마 줄기 벗기기 대회장입니다. 어, 여기에 최연소 참가자가 있는데요, 예상 외로 엄청난 실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두 방향에서 껍질 벗기기, 정말 놀랍습니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되겠군요!"라는 식으로 생중계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울이는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기 삼매경에 빠지고 말았다. (다울이는 요즘 가사 도우미로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단,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계략만 잘 쓴다면 말이다.)

한편, 다울이의 맹활약과는 달리 옆에 앉아서 벗겨 놓은 고구마 줄기를 생으로 날름날름 집어먹는 다랑이와 고구마 이파리를 잎에 넣고 물어뜯으며 노는 다나 덕분에(?) 정작 나는 줄기를 벗기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울이가 혼자서 고군분투한다고 해도 벗겨야 할 고구마 줄기의 양은 쉽게 줄어들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조바심과 (과연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속에서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할 수 없이 다음날까지 작업을 연장해야 했다.

   
▲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던 고구마 줄기. 그런데 김치 담가 반찬 해 놓으니 먹는 건 순식간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다 했다 싶으면 또 할 일투성이인 살림처럼.... 에잇, 다 먹으면 또 하지 뭐. 그게 사는 거다. ⓒ정청라

그렇게 해서 나온 손질된 고구마 줄기 한 바가지. 그마저도 소금물에 살짝 데쳤더니 양이 확 줄어 만들어 놓은 김치 양념이 많이 남았다. 이걸 어쩌나 걱정하다가 아는 분이 주신 얌빈(멕시코 감자라고 불리는데 무, 마, 배가 섞인 맛이 난다.)으로 깍두기를 담갔다. 그래도 양념이 남아 민들레 김치를 담글까 하던 차에 앞집 할머니가 솎은 열무를 많이 갖다 주셔서 그것으로 열무김치까지 담갔다. 그렇게 며칠 사이에 김치 풍년.... 덕분에 종종거리며 밥상을 준비하던 손길이 조금 한가해졌다. 맛깔스러운 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 없다 해도 크게 손색이 없으니까.

한창 저녁 준비할 시간에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앞집 할머니가 그러신다.

"저녁 준비는 다 했어?"
"밥은 낮에 해놨고요, 간단한 반찬 하나만 하면 돼요."
"김치 있응께 든든하제? 김치만 있으믄 꺽정이 없어."

그 말씀에 손뼉은 물론 발뼉까지 치고 싶을 정도로 공감이 되었다. 정말, 김치만 있으면 밥상 차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다. 며칠 안 가 또 다시 김치 걱정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그래서 더욱 김치의 고마움이 사무친다. 무 배추가 아니어도 김칫거리로 손색이 없는 고구마 줄기 이하 각종 푸성귀와 그것을 다듬느라 애쓴 고사리손에게도....

신랑이 밭에서 쪽파를 한 다발 캐 왔으니 그걸로 내일은 파김치나 담가 볼까나?!

   
▲ 가을걷이 특별식으로 짜장면 만찬. 모처럼 김치 풍년에 김치만 세 가지 올려 놓고 호사를 부려 보았다. 남이 보기엔 없어 보이는 밥상일지 몰라도 내 젓가락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두근거린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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