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여가를 이용해 다양한 일들을 하는 세상입니다. 사목현장을 통해 만나는 이들 중에는 라틴 댄스를 배우는 친구, 영어 외에 다른 언어를 배우는 친구, 건강과 몸매를 위해 요가를 하는 친구, 커피를 맛있게 내려 주는 바리스타 과정에 다니는 친구, 제빵, 제과 기술을 익히는 친구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도 같이 따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댑니다. 아무튼 시간을 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일을 찾아 하는 그 친구들이 대견해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 친구가 취미생활로 타로(Tarot) 카드를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그 취미 생활 건으로 저와 면담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필 그날 제가 다른 모임이 겹쳐서 그 친구와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요. 그에 대한 이야기는 월례모임에 함께 나오는 다른 친구가 전해 준 사연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타로 카드를 배우면서 그것 때문에 면담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한국에도 타로 카드가 활성화 되어 가는 건가? 하며 신기해 했습니다. 타로 카드 게임이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타로 카드 게임을 프랑스에서 처음 접했을 때, 우리 말로 설명해도 잘 모를 게임을 프랑스 말로 설명을 듣자니 머리가 멍해졌던 기억도 살아났습니다. 자신의 강한 패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카드를 모아 와서 일정한 점수를 내야 했습니다. 화투나 트럼프 카드와 비교하면 크기도 크고, 그림도 복잡하고, 장 수도 많아 이런 류의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열광할 만한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는 그 청년도 카드 게임을 그렇게 즐기는 스타일은 아닐텐데.... 의아해 하다가 번뜩 머리 속을 스친 것은 바로 타로 ‘점’이었습니다. 십중팔구 이 친구는 타로 카드로 하는 놀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점치는 법 혹은 타로 카드 해석을 배우러 다니는 것에 대해 저와 상의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죄다 혹은 아니다 식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 성향상 재미 삼아 배워 보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저도 타로 카드 해석이 궁금해졌습니다. 차라리 내가 좀 알면, 이런 ‘해석’을 매개로 사람들과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 타로 카드는 여러 장의 의미 있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디자인 종류가 다양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화투로 일수(하루의 운수)를 떼 보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좀 배워 뒀으면 화투점 정도는 저도 볼 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기억컨대, 할머니는 그 당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세례받은 뒤로 할머니가 화투로 운세 떼는 것을 본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어릴 때의 기억이 타로 카드 읽는 법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좀 더 근원적인 이유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로 점을 치는 것, 화투로 일수를 떼 보는 것이 죄냐 아니냐는 질문에는 어느 정도 기준을 둬야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점을 치는지를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런 행동들은 신앙생활의 과오, 즉 죄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개인의 운명은 하느님의 뜻과 연결되어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개인은 자기 양심과 느낌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 앞에 벌어지는 일의 과정과 흐름에 대해 하느님과 상의합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이 그려 주는 의미가 좀 불명확해 보일 때, 우리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도 꿈을 해석하는 이들(예를 들어,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요셉)이 있고, 함께 기도한 뒤 제비를 뽑아 하느님의 사도를 선택하는 모습(사도 1,23-26)을 볼 수 있습니다. 꿈도 제비도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방식 중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이 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근원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이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만큼 그중에 무엇은 합당하고 무엇은 아니다라고 가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 방식들 모두를 인간의 천부적 능력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신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무속에 자문을 구하는 신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떤 차원에서든 일정 부분 위로를 주나 봅니다. 그렇게 찾아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사목적 차원에서 사제나 수도자들이 이웃 종교의 운명 해석법을 좀 익히는 게 오히려 신자들을 잘 모시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좀 더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세에 대해 사족을 달자면, 겸손함을 잃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악운도 없다고 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내게 좋은 운세가 예견된다고 해도 자만은 모든 걸 어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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