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23]

또 비다. 지난 여름 그렇게 기다려도 안 오던 비가 수확철이 되자 장맛비처럼 내리고 있다. 땅콩도 널어 말려야 하고, 수수랑 기장도 바싹 말려 보관해야 하는데, 논에 나락도 베서 털어야 하는데.... 올해는 변화무쌍한 날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애만 태우는 일이 잦다. '기후 변화 위기'가 이렇게 실감 나는 현실이 되고야 말 줄이야.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주린 상황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식량난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 같아 불안하고, 불안은 벌레처럼 스멀스멀 내 속을 갉아먹으려 한다.

▲ 벌레 밥이 되고 있는 배추. 김장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청라

그래서일까? 들판에 벌레가 극성이다. 우리 밭이야 원래 벌레들의 낙원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독한 약을 뿌리는 마을 사람들 밭도 벌레 피해가 심각하다. 벌레가 얼마나 지독한지 약을 몇 번이나 뿌려도 소용이 없단다. 농사를 귀신처럼 짓는 수봉 할머니마저도 "저것 잔 봐. 도라지 이파리가 한나도 없어. 살다 살다 첨이랑께."하며 허탈하게 웃으셨다. 봄부터 여름까지 도라지 밭 풀 매느라 비지땀을 흘리시는 걸 곁에서 지켜봐 온 나로서는 할머니가 아직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웃을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여러모로 속이 상하다. 해마다 산에 밤이 얼마나 많은지 겨울에 먹을 것까지 저장해 둘 정도였는데, 올해는 얼마 줍지 못했다. 아이들과 비 그치는 틈을 타서 부지런히 밤을 주우러 다녔지만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다람쥐나 멧돼지에게 선수를 빼앗기기 일쑤였고, 그나마 주운 것도 벌레 먹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뿐인가. 감에도 벌레가 들어 일찍 홍시가 되어 떨어져 버리는 것들이 많다. 다른 과일나무에 비해 감나무는 약을 안 치고 농사지어도 큰 탈이 없다 했는데 얄궂은 날씨 앞에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일까.

땅에 떨어져 곤죽이 되어 버리는 감을 보며 올해는 감 맛도 제대로 못 보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도 감나무엔 감이 많이 달려 있다. 골목 바로 옆 담장가에 있는 키가 아주 큰 홍시 감나무. 키가 너무 커서 감을 따려면 사다리로도 어림없어 신랑이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에 올라가 공중 곡예를 하듯이 감을 따는 묘기를 선보이고는 한다. 가느다란 감나무 가지에 올라타 아스라이 기대어 선 채로 빛나는 감을 향해 작대기를 겨누면서.... 지켜보는 내가 아찔할 정도로 위험천만해 보이는데 신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섯 해째 감을 따오고 있다. 한 나무에서 200-300개는 거뜬히 따니 홍시 실컷 먹고 곶감 깎아서 겨우내 먹고 감식초 담그고....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작년부터 예측 불가능한 날씨 때문에 곶감은 못 먹게 되었지만 아쉬워도 어쩌랴.)

모처럼 비구름이 걷히고 해가 쨍쨍 눈부신 날, 점심을 먹자마자 온 가족이 감을 따러 나갔다. 다랑이는 다나 유모차를 밀어 주며 아기 돌보미 역할을 하고, 신랑은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딴다. 그러면 다울이와 내가 감나무 아래에 나락망을 펼치고 서서 떨어지는 감을 잡는 거다. 감이 안전하게 사뿐히 떨어질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어 대는 아이들 웃음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진다. 한편, 어쩌다 감이 나락망 밖으로 떨어져서 묵사발이 되면 얼마나 아팠을까 애처로운 마음에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을 내지른다. 그러니 감 구출 작전을 펼치는 구조대원과도 다름없는 모양새다.

▲ 단감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한 컷. ⓒ정청라

마침내 우리들의 조마조마한 숨길 속에서 커다란 바구니로 한가득 감이 쌓였다. 에고 힘들어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락망을 계속해서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더니 어깨가 아프고, 감나무를 올려다 보느라 고개가 끊어질 것 같아 감 따기 작업 종료. 이제 남은 일은 감을 잘 손질해서 안전하게 모셔 두기다.

신랑은 추수를 위해 바쁘게 논으로 사라지고 다랑이는 여전히 다나를 돌보는 책무를 다하고, 다울이와 내가 2인 1조가 되어 뒷일을 맡았다. 내가 전지가위로 감 꼭지를 잘라 손질해 두면 다울이가 그걸 사랑방에 옮겨서 예쁘게 세워 놓는 건데, 다울이의 활약이 눈부셨다. 올 초까지만 해도 일하다 힘들거나 지겨우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던 녀석이 이젠 일하는 재미를 알았는지 콧노래까지 부른다. 감이 담긴 상자가 꽤 무거운데 번쩍 들어올리며 힘 자랑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엎어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다울이 덕분에 서둘러 일이 끝나고 내친 김에 단감나무 앞으로 달려갔다, 사랑방 앞쪽에 있는 단감나무는 홍시나무에 비해 키가 그렇게 크지 않다.(만만한 높이 때문에 다울이가 올라타고 노는 단골 놀이터가 되고는 한다.) 그리고 특별히 거름을 주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올해 많은 열매를 매달았다. 심심할 때마다 나무 아래로 가서 단감 하나 뚝 따 씻지도 않고 베어 먹으면 '아! 이 맛에 내가 살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보물 같은 나무. 일부러 단감을 다 따지 않고 홍시 될 것 같이 노래지는 것만 땄다.

▲ 다울이가 정성스레 모셔 놓은 홍시감. 맛있게 붉어져라 얍! ⓒ정청라

그러면서 문득 이사 와서 두 번째 해 내가 신랑에게 단감나무를 베어 버리자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단감나무 베어 버립시다. 사랑방 앞 시야도 가리고, 밭에 그늘도 크게 드리우잖아요. 차라리 저 자리에 들마루를 하나 놓읍시다. 어차피 저 나무에서 열리는 단감은 맛도 없잖아요. 떫기만 떫고 싱겁고...."

"나무가 가림막이 되어 주니 얼마나 좋아요. 더울 때 그늘도 되고.... 그리고 감이 맛없어서 불만이면 날마다 감나무한테 말을 걸어 줘요.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그러면서...."

뜬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해부터 감은 정말 달고 맛있어졌다. 맛없으면 내가 베어 버릴까 겁이 났던 것일까? 아님, 신랑이 날마다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웠을까? 아무튼 이제는 베어 버렸으면 어쩔 뻔했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단감나무를 향해 사랑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아, 고마운 감나무! 얼마나 오랜 세월 넉넉한 가을을 선물하며 이 자리를 지켰을까. 우여곡절 속에서도 홍시 먹을까 단감 먹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 속에 가을이 익어간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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