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 심포지엄 논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9월 27일 병인순교(박해) 1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가 교회의 문서 자료들을 바탕으로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안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박해와 양요: 덕산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들’이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조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한 교회 측 문서 자료들은 그동안 연구자들이 잘 활용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밝혔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1868년 5월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 등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시기를 따져보면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이에 대항해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공격(병인양요)한 1866년보다 2년 뒤다.

이 사건은 흔히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도 불리지만, 조 교수는 사건이 일어난 지역 이름을 붙여 ‘덕산 사건’이라고 썼다. 이 묘는 지금 행정 구역으로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다.

이 사건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 신부(1827-1903)와 미국인 젱킨스도 가담했으며, 이들이 남연군의 유골을 탈취한 뒤 이를 갖고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려고 했던 것으로 설명하는 자료가 많다.

조 교수는 기존 연구가 “덕산 사건의 발단과 경위를 설명할 때에는 거의 전적으로 오페르트가 남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사건의 당사자인 오페르트의 기록에는 편향된 인식이 담겨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금단의 나라 조선", 에른스트 오페르트, 집문당, 2010. (표지 제공 = 집문당)

예컨대 오페르트는 사건 뒤에 자신의 조선 체험을 담아 출간한 책에서, 그들의 목적이 남연군의 유골 탈취였다는 것은 숨기고 대원군이 미신처럼 믿고 있던 유물을 빼앗아 조선에 개방 압력을 가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덕산 사건을 처음 계획한 것은 조선의 신자들이었고 이에 동조한 페롱 신부가 오페르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조 교수는 “오페르트의 기록은 자기변명과 과장 해석이 끼어 있어서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많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의 한국 관계 문서철 제579권, 제580권, 그리고 덕산 사건 당시 파리 신학교에서 문서고를 담당하며 조선대목구의 대표 역할을 했던 루세이 신부가 조선대목구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서한 문서철 등을 자료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조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페롱 신부가 자신의 계획에 관해 처음으로 생각을 내비친 것은 1867년 5월이며, 그는 “우리 문제”(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의 외교 중재를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8월 무렵 조선인 신자들을 통해 조선 사정을 파악하고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는 일이 실패하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 공사도 선교사들을 위해 실질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867년 연말 페롱 신부의 서한을 보면 그 계획이 구체화됐다.

조 교수는 제네럴 셔먼 호 사건(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대동강에서 불타 침몰한 일) 때문에 덕산 사건을 앞두고 미국 군함이 조선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므로 페롱 신부는 자신이 미국 군함에 동승하여 조선으로 가서 통역관을 자처하며 조선과 미국의 외교 협상을 중재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며 “혹은 그러한 미명 아래에 오페르트와 젱킨스 등과 덕산 사건을 모의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의견을 냈다.

조 교수는 “페롱 신부는 병인양요와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는 조선 천주교회의 회생을 도모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한 페롱 신부는 평화적인 방법이라는 미명 아래에 조선 위정자 조상 유골 탈취라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감행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병인양요보다 덕산 사건이 천주교 박해 등에 끼친 파장이 더 컸다는 것이 교회사학계의 중론이다.

덕산 사건의 결과에 대해 조 교수는 “파급효과는 개인의 위신 추락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박해는 더욱 가열되었고, 강상의 윤리를 도외시하는 극악한 집단이라는 오명을 (천주교가) 뒤집어쓰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날까지도 덕산 사건은 황사영 백서 사건과 더불어 박해 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스캔들로 남게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리델 신부를 비롯하여 조선 대목구의 동료 선교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페롱 신부를 전출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조선 교회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밝혔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의 ‘덕산 굴총 사건’ 항목에 따르면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줬고, 젱킨스는 미국인에 의해 고발 당했으며,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됐다가 1870년 인도 퐁디셰리로 전임됐다. 조상 묘소를 중시하는 조선에서 외국인이 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파헤친 사건은 천주교 박해를 더욱 키우는 빌미가 돼,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뿐 아니라 경기, 경상, 전라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당했다.

▲ 9월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강한 기자

조 교수는 덕산 사건에 대한 추가 연구 과제로 오페르트의 기록이 지닌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한 노력, 페롱 신부가 덕산 사건에 관해 훗날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과 관련된 확인, 이 사건에 연루된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누구였는지 해명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 사제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교회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덕산 사건이 아닐까” 물으면서 “박해자의 칼날에 저항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복음의 관점에서 교회를 다시 일으킬 방도를 찾았어야 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글을 마치며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 주교가 “나는 우리 조선에서는 유럽인들의 간섭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고 쓴 1863년 2월 19일자 서한을 인용했다. 서한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프랑스 함대나, 프랑스 군인, 프랑스 외교관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런 수단을 이용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하 교회에 남아 있을 것이고 우리의 피와 우리 교우들의 피가 계속 흐르도록 할 것이다..... 함대와 군인들이 온다면, 천주교는 외교인들의 눈에 퇴색해 버리고 말 것이며, 우리 교우들의 마음속에서도 신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 밖에도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가 ‘병인사옥과 신자들의 대응’을, 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가 ‘병인박해 전후 조선 선교사들의 조선 이해’를 주제로 발표했다.

종합토론 시간에 한 남성 신자는 “병인박해와 관련해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대한 안 좋은 시선만 갖고 있다”며 “지엽적인 연구 방식보다는 거시적 관점에서 박해가 근대화와 나라 발전에 어떤 영향 줬는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종합토론 사회자 노길명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앙 선조들이 이 땅에서 한 일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뤄지려면 더 많은 교회사 연구와 자료 발굴과 함께, 학교, 사회에 홍보할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본다”며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더 찾고 더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 우리 교회사에 남겨진 과제”라고 답했다.

병인박해는 1866년 초부터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으며, 한국 천주교가 겪은 최대 박해로 평가받는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8000명 이상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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