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9월 25일(연중 제26주일) 루카 16,19-31

루카 복음은 부자에 대해 박하다. 가진 자에 대한 괜한 반감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가지지 못한 자,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들이 그리 된 것에 대한 연민의 또 다른 표현인 듯하다.(루카 4) 부자, 돈, 명예 등을 이 세상에서 누린다는 건, 일정 부분 ‘우연’에 의해서다. 물론 애써 노력하여 스스로 돈을 번 이들은 억울해할 만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부는 ‘우연’이다. 왜냐하면, 본디 돈이라는 건, 부를 쌓는다는 건, 인간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백 원을 벌어도 그 백 원의 일정 부분은 타존재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내 것이라 누리는 것에 대해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는 것, 그게 부자여야 하고, 부자는 그래서 빚진 이들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부자는 살아 있을 때, 먹고 즐기고 입었다. 그것도 호화롭게. 그러나 가난한 이, 라자로는 그러질 못했다. 부자는 그 옆에 누가 있는지 관심이 없었으나, 라자로는 부자 곁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얻어 먹길 바라고 바랐다. 그것도 간절히. 죽음은 이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뒤집는다. 부자가 라자로가 되고, 라자로가 부자가 된다. 아브라함의 말은 죽음 이후 펼쳐지는 공간의 성격을 확실히 규정한다. ‘기억하라’고 부자에게 요청한다. 그리스말로 ‘기억’, 곧 ‘므네메(μνήμη)’는 ‘무덤’과 같은 어근을 가진다. 죽음의 공간에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살아 있었을 때를 기억하게 한다. 죽음은 생명을 되짚어 보는 공간이고, 죽음은 생명이 어떻게 그 가치를 지녀야 할지 고민해 보는 공간이어야 한다.

▲ 죽음.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우린 모두가 죽어간다. 죽어가는 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고민하는 건, 살아 있음을 더욱 가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삶은 서로에 대한 책임과 배려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는 가르치고 선포한다. 복음에서도 아브라함은 부자의 다섯 형제에게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이 함께한다고 지적한다. 예수는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을 ‘황금률’로 요약한 바 있다.(마태 7,12) 남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실천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전적인 연대가 죽어서 고초가 아닌 위로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다.

지진이 여진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인민들은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한다. 정부의 대표는 여전히 ‘핵, 핵’거리며 안보를 이야기한다. 제 집이 흔들리는데도 옆집더러 잘하라 말하는 건, 기만이고 오지랖이다. 그런 정부와 대표에게 하고 싶은 말…. 죽어갈 텐데, 살아 있음을 생각해 보라는 아브라함의 말이다. 물론 살아 있을 때, 부자는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다. 그래서 지진은 더 아프고, 여진은 더 공포스럽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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