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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내 송편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부엌데기 밥상 통신 - 22]
정청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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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2  11: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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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데기 아줌마들에게 명절은 고난의 십자가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아야지, 음식 장만해야지, 상 차려야지, 어려운 손님을 맞거나 또는 인사를 다녀야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일상에서 짊어지는 무게의 세 배 정도는 힘이 드는 것 같다. 특히 결혼 초에는 (지금보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도) 세 배 정도가 아니라 열 배는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땐 명절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몰라 내가 힘든 게 그냥 개고생이라고만 여겨졌기 때문이다.(나 힘든 걸 몰라주는 신랑이 얄미워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명절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능력이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면, 진정한 부엌데기로 거듭나 살고자 한다면, 명절이야말로 내 부엌데기 근육을 키우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평소 잘 안 쓰던 근육을 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청소를 하더라도 얼렁뚱땅 대충 치우고 말았다면 명절 준비를 계기로 안 치우던 데까지 구석구석 치울 수가 있다. 안 쓰는 이불까지 다 꺼내어 깨끗이 빨고, 잘 안 해 먹던 음식에 도전을 한다. 비린내 나는 생선, 기름진 전, 해 먹기 번거로운 묵나물.... 떡도 빚어 먹는 떡은 손이 많이 가니까 잘 안 하게 되는데 추석엔 마음먹고 송편을 빚는다. 아이들은 송편 빚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나는 이번엔 어떤 송편을 빚을까 설렘을 안고 궁리를 한다.

   
▲ 쌀가루를 빻으러 온 가족이 함께 나가는 길. ⓒ정청라

내가 주도해서 도전한 첫 송편은 다랑이 한 살 때 빚은 송편인데, 그땐 겁도 없이 모시 잎 송편을 해 먹겠다고 달려들었다. 우리 마을엔 모싯잎이 귀해서 앞집 할머니를 따라 산 깊숙한 데까지 올라가 모시 잎을 따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었지 싶다. 그깟 모시 잎이 뭐라고 애 둘을 업고 끌고 내 키만큼이나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후미진 산골짜기까지 들어갔나. 그렇게 마련한 모싯잎을 꽁꽁 절구에 찧어 쌀가루 반죽에 넣고 치대어, 찐 동부를 고물로 넣어 송편을 빚었더랬다. 고생은 많이 했으나 고물이 설컹거려서 떡 맛을 망치고 만 내 첫 송편. 그래도 집에 온 손님도 싸 주고 나름 보람이 있었다.

그 다음 해엔 밤이 넉넉했던지라 밤을 소로 넣은 고급 송편을 빚어 먹을 수 있었고, 지난해엔 아이들 좋아하는 깨고물로 조금 더 능숙해진 솜씨의 송편을 빚었다. 올해는 네 번째인데 젖먹이 다나까지 데리고 송편까지 빚을 수 있으려나 고민이 되었다. '그냥 생협에서 송편을 한 봉지 살까? 사 먹는 게 모양도 곱고 맛도 더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달이 두둥실 차오르는 것을 기다리며 아이들은 정말 간절하게 송편 만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근슬쩍 신랑에게 "송편 빚으려면 쌀가루를 빻아 와야 할 텐데...." 하고 말했더니 신랑이 아이들을 다 데리고 쌀가루를 빻으러 다녀오자고 했다. 명절맞이 장도 보고, 쌀가루도 빻고, 거기에다 독서의 달 행사로 도서관에서 하는 인형극도 관람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추석맞이 나들이 삼종 세트!

다나 태어난 뒤로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걸어 나가는 나들이 길이었다. 다랑이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친구빠빵'이라 불리는 꼬마 자동차에 앉고, 다울이도 요새 한창 재미를 붙인 씽씽이를 타고 앞장을 섰다. 나는 아기띠를 두르고 다나를 안았는데 이 작은 아가씨까지도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때는 바야흐로 가을! 앞에 뒤에 옆에 온통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니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나도 이런데 아이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엄마, 다나는 이빨 없어서 떡 못 먹어? 이빨 생기면 내가 다나한테 떡 줄 거야."
"다랑이가 다나 떡 만들어 주려고? 우와, 엄마도 먹고 싶다."
"엄마도 줄 거야. 형아랑 아빠도 줄 거야."

먹보 다랑이는 나들이 나설 때부터 떡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발을 굴렀다. 다울이는 떡보다 도서관에서 빌려 올 만화책 생각에 씽씽 달렸다. 그러니 다나를 안고 걷는 나보다 한참을 앞서 나간다. 어느새 아이들이 저만치 커서 나를 앞서가는구나 싶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하던지.... 

   
▲ 앞서 가는 신랑과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뒤따르던 그 가을 길. ⓒ정청라

남들이 보면 안쓰러울 만도 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추석에 송편 좀 빚어 먹겠다고 애 셋을 데리고 십 리를 걸어 나가 1시간이나 버스를 탄다고 하면 왜 그렇게 궁상맞게 사느냐고 혀를 찰 게 뻔하다. 쌀가루용 쌀을 준비하려고 저녁마다 쌀에서 뉘를 고르고 전날 밤에 깨끗이 씻어서 조리로 일었다가 물에 하룻밤 불린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한심해서 한숨까지 푹 내쉬리라.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오. 우리에겐 쌀가루를 빻으러 가는 나들이가 그저 신나는 여행인 것을.... 그렇다, 여행! 그냥 돈 쓰러 가고 먹고 놀기 위해 가는 여행이 아니라 주제가 있는 여행이다. 일명 쌀가루를 빻으러 가는 여행! 이 여행길에서 주워 담은 이야기는 고스란히 우리가 빚는 송편과 함께 담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돈 주고 사 먹는 송편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모양이 어수룩하고, 맛도 어설프지만 그래도 그 어떤 송편과도 바꿀 수 없는 송편!

포도즙을 내어 쌀가루를 물들이고, 검은깨를 빻아 설탕과 버무려 준비한 소로 추석 전날 늦은 밤까지 송편을 빚으며 나는 쌀가루를 빻으러 나가던 그 길을 떠올렸다. 앞서 가는 신랑과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뒤따르던 그 가을 길이.... 이렇게 해서 나의 네 번째 송편은 또 그 나름의 이야기를 남기게 되었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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