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9월 11일(연중 제24주일) 루카 15,1-32

오늘 복음이 ‘회개’에로의 초대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명확하고 뚜렷하다. 다만, 복음을 대하기 전, 회개가 무언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은 정리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회개의 사전적 의미인 '돌아서다'(μετάνοια)라는 뜻을 먼저 캐묻고, 그것이 신앙인들의 일상에선 어떻게 이해되는지 비판적 관찰이 필요하다.

돌아선다는 것은 지향하는 대상에로 나아가는 적극적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의 지난한 노력과 노력을 통한 어느 정도의 성과에 우린 집착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건, 돌아서는 것의 ‘한 방향’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더우기 오늘 복음에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그 잘못에 대한 반성은 그리 강조되지 않는다. 잃어버린 양이, 잃어버린 은전이 어떤 반성을 했는지가 중요치 않다는 말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되돌아간 것 역시, 자신의 삶이 바닥을 친 것에 대한 후회이지 되돌아가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나 그에 따른 성과는 이야기되질 않는다.

돌아선다는 것은 지향점의 반대편을 생각해 봐야 한다. 요컨대 버릴 건 무언지에 대한 고민이 회개의 선행 조건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두었다. 잃어버린 은전을 위해 집 안을 샅샅이 뒤질 만큼 부인은 다른 것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돌아온 작은 아들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의 삶, 그것이 방탕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삶에 대한 포기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갔다.

회개하기 위해, 우린 지금껏 회개한 방식과 의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의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는 자학적 정신 개조가 아니며, 각자도생을 위한 도인의 수련 과정도 아니다. 회개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그 탐색을 통한 가질 것과 버릴 것에 대한 통렬한 구별이다. 그리하여 회개는 노력해서 주어지는 선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주체 못할 기쁨으로 완성되고 지속된다.

▲ 회개란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고 살아가던 아들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회개해서 돌아온 자리는 변화된 자리가 아니다. 본디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회개는 제 삶의 수정이 아니라 제 삶의 복원이다. 백 마리 양을 몰고 가던 목자의 일상으로 은전 열 닢을 가졌던 부인의 일상으로,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고 살아가던 아들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저마다 다르고, 다른 것을 하나로 통합해서 생각할 이유는 없다. 회개하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현실 종교인들의 파시즘적 제안들이 회개를 가로막는다. 제 삶의 자리를 도외시한 채, 친구따라 강남 가듯 켜켜이 쌓아 가는 집단적 회개의 노력들은 실은 제 잘못을 면책하는 비겁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회개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보기에 부끄럽고, 보기에 안쓰럽고, 그래서 보기에 불편하고 슬퍼도 나를 있는 그대로 먼저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 아닌 것에 얽매이고, 붙잡히고, 기만당한 지난 시간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게 회개며 그 자리에 아버지는 늘 함께 계신다. 나를 찾아야 아버지를 찾는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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